병와전서 강도지 [甁窩全書 江都志] - 해제
- 책 ID:
kh2_je_a_vsu_55012_000
- 원자료 출처: http://yoksa.aks.ac.kr/jsp/aa/InfoView.jsp?aa10no=kh2_je_a_vsu_55012_000
G002+AKS-AA55_55012_000
[1]
- 서론
「강도지」는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1694년부터 1696년까지 강화유수 민진주(閔鎭周)의 요청으로 강화도에 머물면서 약 3년에 걸쳐 지은 강화도에 관한 사찬 지리지(地理誌)이다. 사찬 지리지라고는 하지만 현존하는 강화도 지리지 가운데 저술된 시기가 상당히 이르고 분량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충실하여 그 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는 저작이다. 이런 「강도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병와 이형상이란 인물에 생애와 사상과 더불어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남환박물(南宦博物)」과 같은 저작을 쓴 그의 지리지와 국방에 대한 의식, 조선후기 지리지의 편찬과정, 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서울 방위 전략 속에서 강화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같은 시대적 상황, 그리고 다른 강화도 지리지와 비교 검토를 통해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 병와 이형상의 생애와 사상
먼저 병와 이형상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병와 이형상에 대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권영철의 「병와 이형상 연구」(한국연구원, 1978)이었다. 그 뒤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병와전서」(1980)와 「탐라순력도」(1982), 「국역 병와집」(1990), 「한국 사상가의 새로운 발견」(1993) 등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그가 한국 사상사 및 국방 및 지리지 편찬 등에서 남긴 업적에 비하면 널리 알려진 학자는 아니다. 비록 중복이 되긴 하지만 그의 생애를 간단하게 알아보겠다.
이형상은 자가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또는 순옹(順翁)이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 할아버지 장형(長馨)은 현령을 지냈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증직되었다. 그는 효종 4년(1653) 5월 23일 인천 소암촌(䟽巖村)에서 성균관 진사인 아버지 주하(柱厦)와 파평 윤씨 윤세구(尹世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질이 있어 11세인 현종 4년(1663)에 「독동사기(讀東史記)」를 지어 동네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9세인 현종 12년(1671) 부친의 상(喪)을 당하자, 인천의 농장에서 스스로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25세인 숙종 3년(167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숙종 6년(1680) 28세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다음해인 숙종 7년(1681) 29세에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임명되어 관계에 첫 발을 디뎠다.
그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호조좌랑 등 내직을 잠깐씩 지냈기는 했지만 경주경력, 성주목사, 금산군수, 청주목사, 동래부사, 제주목사, 영광군수 등 주로 외직을 지내서 내직 4년과 외직 8년을 합쳐 모두 12년간의 관직생활을 하였다.
그는 본시 청렴결백하고 사리에 밝아 직분과 의무를 다한 강직한 선비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관직생활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가 호조좌랑으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가 가지고 가는 세폐포(歲幣布)가 해마다 늘어남으로 이를 보포(報布: 병자호란 이후 바치던 포)와 비교하니 9척이 길므로 앞으로 큰 폐단이 될 것이라 여겨 이를 잘라 보낸 적이 있다. 그리고 부정자(副正字)로 근무할 때에는 조정의 승진제도가 크게 문란하여 자신의 아래 직급에 있는 사람이 엽등하는 일을 좌시하지 않고 비판하여 직첩까지 빼앗겼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아 숙종으로부터 “이형상 같은 사람은 나도 꺾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성주목사를 지낼 때에는 춘궁기에 백성을 진휼하는 한편 유학을 장려하여 20조 의 훈첩(訓帖)을 반포하고 유생 150명을 선출 양성했으며, 인조 때의 의사(義士)인 이사룡(李士龍; 1612~1640)의 묘에 제사지내고 다시, 충렬사(忠烈祠)를 지어 그의 업적을 길이 남겼으며, 독용산성(禿用山城)이 무너져 방치되고 있음을 보고 만여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삼일만에 축성하였다. 그 후 금산 덕유산에 도적이 창궐하여 금산 사람들이 조정에 이들의 소탕을 진정하자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알려진 그가 금산군수로 임명되니 도적들이 이 소식을 듣고 부임 전에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동래부사를 지낼 때에는 동래가 일본과 접촉되는 문호로써 관방시설의 강구를 역설하고 당시 사절명목으로 도래하는 일본인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에 시정에 힘썼으나 곧 직책이 갈리고 말았다.
경주부윤 때에는 운주산의 토적 수천 명을 해산시켰으며 교원에 과업을 권장하고 학풍을 진작시켰으며 신당(神堂)이 폐해가 많다고 하여 이를 불사르고 그 터를 향교에 소속시켰으며 그 외로 서리들의 기강을 확립하는 등 치적이 많았다. 제주목사로 제수되자 더욱 비루한 풍속을 혁신하고 교화에 힘썼으니 성묘(聖廟)릍 수리하고 고명한 학자를 선생으로 모셔 글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고, 부, 양 3성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동성혼인의 풍속을 금지시키고 벗은 채로 해물을 채취하는 해녀들에게 옷을 제정하여 입게 하였으며 음사(淫祠)를 더욱 철저히 단속하여 신당(神堂) 129개와 5개소의 사찰을 없애고 이에 종사했던 천여명의 무격 등 285호를 귀농시켰다. 그가 당시 철폐했던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그 후 숙종 45년 가뭄이 계속된다하여 도민의 진정으로 다시 설립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사실을 보아 과단성 있는 면을 엿볼 수가 있다. 이처럼 그의 제주에서의 치적은 두드러졌으나 당시 대정현(大靜縣)에 안치된 오시복(吳始復)을 편파적으로 보호한다하여 대사간 이건명(李健命)의 장계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제주에서 영천으로 돌아올 때는 다만 한라산 백록담의 고사목으로 만든 단금(檀琴)과 시 원고 몇 권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영광군수에 잠시 임명된 후 경원부사, 장단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일체 사임하고 영천(永川)에 호연정(浩然亭)이란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기거하면서 남은 일생을 저술로 보내고자 하였다.
76세인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일시 경상하도 호소사(呼召使)로 부름을 받았으나 무고로 의금부에 70여 일을 수감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 후 서울, 인천 등지에서 우거하다가 영조 9년(1733) 81세로 과천 객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묘소는 현재 광주(廣州) 동오산(東午山)에 있으며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국가의 재물을 낭비할 수 없다하여 일체 석물을 쓰지 않고 다만 그의 호인 병와순옹(甁窩順翁) 네 글자만 기록된 묘표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는 사후 60여 년 뒤인 정조 20년(1796) 당시 판중추 윤숙(尹塾)의 추천으로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그가 지방 자제 교육을 위해 세운 성남서당(城南書堂)은 그의 사후 이 서원에 제향되어 오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없어졌다. 그와 관련된 유적은 영천의 호연정만 남아 있다.
위에서 보듯이 그는 능력에 비해 중앙 관료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의 청렴결백하고 직분과 의무를 실천하는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가 지방의 목민관을 지내면서 닦은 백성 교화와 국방 의식은 더욱 확고해져 「강도지」나 「탐라순력도」 등을 저술할 수 있은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호연정에서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관직 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3]
- 이형상의 저술과 사상
이형상이 평생에 걸쳐 저술한 저서는 그의 저서 목록에 의하면 142종 326책이고 현존하는 것이 60여종 2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이런 그의 저술은 양주목사에서 파면된 뒤 강화도에서 약 3년간 은거하면서 「규범선영(閨範選英)」과 「강도지」를 저술하였지만 나머지 대부분 저작은 영천의 호연정에서 이루어졌다. 호연정은 그의 나이 48세(숙종 26년; 1700)에 영천에 정착하면서 지은 정자이자 서재이다.
영조 50년(1774)에 간행된 「병와선생문집」은 본집 18권에 부록으로 행장 1편을 붙인 9책으로 그의 저서 가운데 시문과 성리학에 관한 저작을 간행한 것이고, 기타 다른 저작들은 고본(稿本) 상태로 보관되다가 198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병와선생문집」과 합하여 「병와전서」 10책으로 간행되었다. 현재 그의 저술 가운데 잡저류에 속하는 일부는 유실되어 없어졌으나 거의 대부분 아직도 고본 상태로 그의 후손들이 보존하고 있다.
병와 이형상의 학문과 사상을 대상으로는 약간의 연구가 있다. 그 연구 결과를 보면 그의 철학사상에는 조선시대 유학자라면 반드시 있는 이기론(理氣論)을 보면 이는 관작이며 기는 관작을 담는 그릇이라는 이관기기설(理官氣器說)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의 측면에서 보면 기는 빈 그릇으로서 관작을 담아야 의미가 있고, 기의 측면에서 이는 빈자리로서 기로 채워져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서로 떨어져 있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항상 떨어지면 안되는 상호 보완관계라는 것이다. 곧 관작이 없는 기는 무직자와 같고 관원이 없는 이는 공석으로 있는 관작으로 서로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이와 기는 선후를 따질 수 없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그의 천인관(天人觀)을 보면 천은 명령자이고 사람은 그 명령을 받아 수행하는 자로 규정하였다. 이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명(命)이다. 곧 사람은 하늘이 준 명을 성실하게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하늘의 명이 리로서 체(體)이고 그를 실행하는 사람의 도는 기를 채우는 것으로 용(用)이다.
이런 그의 철학사상은 그의 호 가운데 하나인 순옹(順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강조한 순(順)은 옳은 것은 내가 해야 할 일로써 나의 임무라고 여겼다. 그가 당시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실천력은 바로 그의 철학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그의 경학 사상을 보겠다. 그의 근본적인 입장은 유학의 근본 정신, 곧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로 이어지는 성학(聖學)의 계보를 중시했고, 그가 제시한 구경인 주역, 시경, 서경, 춘추, 의례, 악경, 주례, 이아, 효경은 공자 또는 공자의 문인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보아서 다른 어떤 이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경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송대 성리학자, 특히 주희의 해석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학계의 특징인 학문적 분위기 때문인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가 가장 중시한 경전은 「주역」으로 특히 변화의 원리가 근본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예학에 관해서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예학은 예와 악이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조화로운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번거로운 수식과 까다로운 예절로 흐르고 음악에 힘쓰지 아니하며, 조선의 당쟁도 예에 지나친 결과로 빚어진 폐단임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향리에서는 향약을 강조하고 이단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음사(淫祀)는 많은 재물과 곡식을 낭비하는 망령된 신앙이라며 적극적으로 배격하여 근무하는 지역의 신당(神堂)을 대부분 불살랐다. 그리고 동성동본이나 가까운 인척간의 혼인 등을 배격하고, 남녀 혼욕(混浴)이나 여자의 나체 행위를 금지시켰으며, 남해안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초분(草墳)의 풍습도 금지시키는 등 유교적 풍습의 정착에 힘썼다.
그리고 그는 나라에 대한 충(忠)과 절의(節義) 사상을 강조하여 임경업 장군의 전기를 짓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 이사룡(李士龍)의 사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아울러 국방이나 전정(田政)과 세정(稅政)과 같은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관이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개괄적인 면만 알려져 있을 뿐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알려지지 않은 대학자인 이형상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그의 생애와 저서 및 사상을 살펴본 대로 그는 중앙관료로서가 아니라 목민관으로서 활약했으며, 또 학문에 있어서는 이론가라기보다는 박학다식한 경세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이기론이나 예학을 강조하고 경학에 관한 저서를 남긴 이외에 이단을 물리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거나 국방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전정이나 세정을 개혁하는 등 부조리한 현실의 개혁에 많은 관심을 갖고 그것을 추구했던 점이 다른 성리학자와 구별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는 고리타분한 성리학자가 아닌 현실의 개선과 유교적 사회질서의 정착에 투철한 신념을 지닌 학자이자 경세가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형상은 17, 18세기의 남인계열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사람이었다. 그가 남인계 학자였음은 허목(許穆)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노론 세력에 눌려 중앙 관료가 되지 못했다든지 남인계 정객이자 학자인 채제공(蔡濟恭)이 서문과 행장(行狀)을, 남인의 대표적 학자인 이상정(李象靖)이 발문(跋文)을 쓰고 있다든지 노론이 소론·남인을 탄압한 이인좌의 난에 연좌되었다든지, 영남지방인 영천(永川)에 우거하고 있었던 것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가 처음부터 남인이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먼저 그에게 「강도지」를 저술하는 데 도움을 준 민진주는 노론계열이었으므로 그와 어느 정도의 친분은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경주부윤을 지낸 후 그 지역 사람들의 요청에 응해 영천에 정착할 무렵에도 일부 남인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4]
- 「강도지」의 체제와 내용
「강도지」는 강화도의 전략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숙종에게 올리려고 1696년에 편찬된 강화도 지리지다. 이 책은 그가 양주목사에서 파직된 뒤에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가 살았던 1694년부터 당시 강화유수였던 민진주의 도움을 받아 저술하기 시작하여 1696년에 일단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696년 「강도지」를 숙종에게 올리려고 지은 「의진강도지소」가 이해에 작성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뜻이 좌절되자 그대로 서재에 묻힌 것으로 보이는데, 어쩐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1698년에 해당하는 기록들이 「강도지」에 보이므로 아마도 1698년경에 일부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강도지」의 체제는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항목은 모두 65조항이다. 그러면 「강도지」의 내용을 조항에 따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5]
상권
폭원(幅員) : 강화도는 포구와 만이 많아 섬 주변 둘레의 길이가 제각각이었으나 이형상은 「강도지」에서 82,187보(步)라 하였고 이를 환산하여 228리 107보라 하였다. 아마 이것은 저자가 직접 답사하여 잰 기록으로 보인다.
연혁(沿革) : 강화도의 명칭이 변경된 과정과 관직의 변천을 서술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각종 문헌을 실증적으로 조사하여 미심쩍은 곳은 분명히 기록하는 실증적인 자세를 볼 수 있다.
성씨(姓氏) : 강화의 본부와 속읍인 진강(鎭江)과 하음(河陰)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민호(民戶) : 강화도 인구도 역대 인구조사의 기록을 연대별로 기록하였는데, 군인의 수효는 그 수효에서 뺐다.
관원(官員) : 유수(留守) 이하 사각참봉(史閣參奉)까지 기록하였는데, 관원의 근무나 업무에 관한 공문 등을 연대별로 기록하였다. 그 뒤에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수록하여 실제 운용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체제는 다른 지리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강도지」를 숙종에게 올리려는 목적으로 저술하였다는 저자의 글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명환(名宦) : 신라의 계홍(啓弘)부터 숙종 24년(1698)에 부임한 김창집(金昌集)까지 기록하였다. 그런데 「강도지」는 1696년에 완성되었는데, 그 후에 부임한 이이명과 김창집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1698년경에 일부 보완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여러 문헌을 조사하여 빠져 있던 고려의 박자안(朴子安)과 조선의 이성(李晟) 등을 추가하여 모두 76명을 수록하였다. 성명 다음에 각자의 품계와 부임 시기, 교체 시기, 이동 부서 등을 일일이 기록하였다.
낭청(郎廳) : 경력(經歷) 김광환(金光煥)부터 신서화(申瑞華)까지 43명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방식은 ‘명환’과 같다.
차제(差除) : 관직 임명에 관한 사항으로 유수부터 장교까지 기록하였다. 각기 관직 명칭 아래에 임명절차, 임무, 현황, 필요한 능력 등을 적으면서 임명과 승진의 문제점과 책임소재의 불확실성 및 별장 장교들이 무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황까지 기록하고 그 개선책까지 적고 있다.
구근(久勤) : 각 직책의 근무 연한을 기록하였는데 승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진보의 장교 근무 자세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적고 있다.
방리(方里) : 강화도 관내 행정구역의 위치와 거리 등을 기록하면서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위를 통박하면서 이것을 개선하려면 관리의 수효를 줄여야 한다고 적고 있다.
산악(山岳) : 강화도 관내 산들의 위치와 사찰, 봉수 등을 기술하고 산에 식목의 권장과 벌목의 금지를 주장하고 있다.
해도(海島) : 강화도 주변에 있는 20여 섬의 위치, 면적, 민호, 목장, 둔전, 생산물, 수로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천포(川浦) : 16개의 내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골을 나열하고 그 위치, 유입로, 고적 등도 함께 기록하였다.
고적(古蹟) : 참성단 이하 여러 고적을 기록하고, 각 항목마다 역사, 전설, 경관, 제영, 현존여부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사단(祠壇) : 참성단을 비롯한 제사를 지내는 곳을 열거하였는데, 각 사단의 위치, 설치내력, 제사절차 등을 기록하였다.
봉수(烽燧) : 각 봉수의 위치와 봉수전달 경로를 기록하였다.
토산(土産) : 강화도의 토산물인 석회, 청난석, 홍어, 조기 등을 기록하였다.
인물(人物) : 고려의 위수여(韋壽餘)를 비롯하여 조선의 22명의 인물을 열거하고 해당 인물의 품계, 행적 등을 기록하였다. 아울러 강화도 출신이 아니면서 강화도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우거(寓居)’라 하여 별도로 열거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도원수를 지낸 권율(權慄) 장군도 포함되어 있다.
풍속(風俗) : 강화도의 풍속을 7가지로 적고 있는데, 유교적 습속이 아닌 것에 대해서 상당히 강한 어조로 논박하였다.
충신(忠臣) : 황선신(黃善身)부터 39명을 열거하였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관이 아닌 무명의 졸병이나 노비까지 적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 사람으로서 강화도에 와서 순절한 인물을 뒤에 따로 적어 놓았다.
효자(孝子) : 권태중(權泰重)을 비롯한 30명을 열거하면서 각자의 효행 사적을 상세하게 적었다. 여기도 ‘충신’항목처럼 양반 이외에도 양인, 첩의 아들, 노비, 서자 등도 포함시켰는데, 양인이나 노비들의 이름을 이두식으로 적은 것이 흥미롭다.
열녀(烈女) : 고려부터 조선에 걸쳐 강화도의 열녀와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특히 병자호란 때) 열녀 140여 명을 기록하였다.(정확한 숫자가 아닌 것은 누구의 첩과 딸들이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방법은 앞의 ‘충신’과 ‘효자’항목과 같으나 정절을 지킨 방법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맨 뒷부분에 충신, 효자, 열녀를 종합하여 서술하였다.
장교(將校) : 중군(中軍) 이하 도훈도(都訓導)까지 그 직책과 인원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군병(軍兵) : 무학(武學) 이하 봉군까지 그 직책과 인원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관련된 ‘사목(事目)’도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외적에 대한 방비책에 대해서 길게 서술하였다.
관속(官屬) : 아전 및 노비들에 관해 그 임무와 인원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속읍(屬邑) : 인조 24년(1646)에 숙종 9년(1683)의 강화도를 방비하기 위한 경기도와 황해도의 군영 조직과 그 인원 및 변화 과정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런 편제가 실제 전쟁에서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음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구체적인 대비책으로 연안, 배천, 부평은 총융청으로 이속하고 양천, 금천, 통진은 그대로 강화도에 예속시킬 것을 건의하고 있다.
진보(鎭堡) : 월곶진을 비롯한 13개의 진보에 대해 그 현황을 기록하였다. 진보를 지키는 병졸들이 받는 것 없이 상부의 등살에 못이겨 대부분 도망쳤음을 기록하여 둔전을 마련하여 병졸이 안심하고 근무할 수 있도록 건의하고 있다.
형승(形勝) : 일반 지리지의 ‘형승’은 단순히 그 지역의 경관만 기록하고 있는데, 「강도지」에서는 강화도의 자연환경을 설명하면서 이곳을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방책을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파수(把守) : 북일곶부터 장곶까지 49돈의 소속을 밝혔으며, 또 본부여군(本府餘軍), 파수군(派守軍), 여정(餘丁)과 실제의 여정(餘丁) 등을 상세히 밝혀 놓았다. 그리고 앞의 ‘형승’과 마찬가지로 방어 방법을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면서 제시하고 있다.
성곽(城郭) : 강화외성, 강화부성(내성) 등에 대해 당시 성곽의 길이, 성곽의 축조 방법, 시설의 종류와 그 수효 등을 기록하면서 강화도가 적의 침입 때 방어에 유리한 점을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면서 실증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방어만 고려하지 말고 공격하는 입장도 고려해야 적의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장수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돈황(墩隍) : 숙종 때까지 있던 49돈대에 대해 돈대 축조 연대, 보유 무기 수량, 장교와 병사의 수효 등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돈대 운영의 모순점과 우리나라 성곽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면서 효과적인 방어 전략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진도(津渡) : 강화도에서 외부로 통하는 나루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아울러 적의 공격이 있을 때 염하를 건너지 못하도록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전략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선박(船舶) : 강화도의 관선(官船)과 사선(私船)의 수효와 배를 이용한 방어 전략에 대해 기록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백성들의 생계 유지와 국방의 문제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고, 당시 새로 등장하는 대포의 사용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에 대해서도 제시하고 있다.
궁궐(宮闕) : 강화도에 있는 행궁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영전(影殿) : 영숭전(永崇殿)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 것과 봉선전(奉先殿)에 세조의 오진을 봉안한 것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강도지」를 숙종에게 올리려고 쓴 것이기 때문에 왕실과 관련이 있는 이 항목에 대해 특히 자세하게 기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각(史閣) : 정족산사고에 대한 기록으로 선원보각(璿源寶閣)에 관해서도 기록하였다.
향교(鄕校) : 본래 동문 밖 송악산에 있던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긴 상황과 당시 강화향교의 배향 인물, 청금록 등재 인원, 교생 인원, 향교의 임원과 노비, 위토, 염전, 배 등의 향교 재산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사우(寺宇) : 병자호란 때 순국한 김상용을 비롯한 인물들을 배향한 충렬사에 관해 관련 인물들의 추배 과정과 그 이유, 그들의 행적 등을 자세하게 기록했으며 배향 인물의 제문과 충렬사 상량문까지 수록하였다. 끝에 윤계(尹棨)가 잘못된 조사로 충렬사에 배향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애석해 하였다.
능묘(陵墓) : 고려 고종의 능인 홍릉을 비롯한 능과 묘의 주인공과 위치를 기록하였다.
불사(佛寺) : 갑곶 서쪽 언덕에 있던 진해사를 포함하여 10곳의 사찰의 위치, 사적, 당시 상황 등과 승려의 호구가 146명임을 기록하였다.
누관(樓觀) : 누정(樓亭)을 기록한 것인데 상량문과 현판시도 수록하였다. 다른 항목에 비해 소략한 편이다.
공해(公廨) : 관아(官衙) 건물에 관한 기록인데 건물의 규모, 연혁, 상량문 등을 기록하였다.
창고(倉庫) : 부창(府倉)을 비롯하여 각종 창고의 규모, 위치, 보관 곡식의 종류와 수량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중간 모리배들의 방납(防納) 폐해를 막아 백성들을 보호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군향(軍餉) : 곡식의 종류와 그 보관하고 있는 양을 상세히 기록하고 적절한 보관 양과 보관 방법 등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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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
군기(軍器) : 강화도에서 보관 중인 화약, 화포, 쇠노 등의 제조방법, 사용방법까지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것이 다른 지리지나 읍지에 비해서 「강도지」의 특색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으로 국방의 요충지로서 강화도의 방위상 중요도와 필요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항목이다.
내탕(內帑) : 내탕은 임금의 사사로운 창고로 강화도에는 객사 북쪽에 내탕이 있었다.
제궁(諸宮) : 각 궁궐의 궁방전에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에 관한 기록이다.
각사(各司) : 각 관청에 소속된 창고인데 강화도가 국방의 요충지라서 주로 군영의 창고들이 많았다. 각 창고의 위치와 보관물품 등을 기록하였다.
교량(橋梁) : 강화도에 있었던 다리의 위치와 축조된 재료의 구분, 건립 연도 등을 기록하였다.
제언(堤堰) : 강화도에 있는 제방에 대해 쌓은 인물, 축조연도, 그리고 면적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여기에 제방을 쌓는 방법까지 기록하고 있다.
천정(泉井) : 전쟁시 중요한 것의 하나가 바로 우물이다. 그런데 강화도의 49돈대에는 우물이 없어서 5리 밖에서까지 길어와야 함을 기록하면서 평상시에도 이렇다면 유사시에는 큰일이므로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아울러 당시까지 알려진 우물을 찾는 방법도 기록하였다.
풍우(風雨) : 강화도를 방어하는 데에 있어서는 비바람과 가뭄 등 날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여겨 당시까지 알려진 일기예측 방법을 기록하고는 기상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답(田畓) : 1672년, 1680년, 1698년의 면적과 소출을 기록하였고 궁실에 의한 절수(折受) 금지를 주장하 였다.
목장(牧場) : 강화도는 제주도 다음으로 목장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강화도에 진보와 돈대를 수축하면서 이들의 식량을 마련하는 문제, 북벌에 따른 말 공급 등의 문제로 강화도의 목장은 설치와 폐지가 번복되고 또 그 과정에서 토지의 겸병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기록하였는데 「강도지」가 저술되던 1696년 경에는 이미 목장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둔전(屯田) : 둔전의 면적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는데 여기서도 목장의 혁파에 따른 토호들의 강점폐단과 초군(哨軍)의 위토(位土)로 삼은 땅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매매까지 되는 당시 상황을 기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군사들에게 둔전을 경작시켜 각 진보의 경비로 충당시키고 일부는 창고에 보관하여 군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역(賦役) : 강화도는 강화유수부에 전속(專屬)되었기 때문에 국상(國喪)이나 임금의 거둥에도 부역에 응하지 않음을 밝히고 각종 세금제도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아울러 각 관청에서 가렴주구하는 상황도 기록하여 그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요록(料祿) : 강화도의 관리들에 대한 봉급을 기록하였는데 지급하는 물품의 종류와 수량, 그리고 부의(賻儀)하는 액수도 기록하였다.
시재(試才) : 1627년 강화도에서 실시된 문과와 무과에 대해 기록하였다.
적거(謫居) : 고려 때 강화도에 유배를 당한 주로 왕과 왕족을 기록하였다.
축물(畜物) : 강화유수부에서 관리하고 있던 가축의 종류와 수량을 기록하였다.
제영(題詠) : 고려 이후 유명인사들의 시를 수록하였으나 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어서 그런지 다른 항목에 비해 소략하다. 아마 「여지승람」의 체제를 따랐기 때문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총론(總論) : 저자가 「강도지」를 지은 목적 의식이 드러난 곳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병자호란에 대한 반성과 당시(1696) 청의 재침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식과 과거 김시양(金時讓)의 건의를 무시한 것에 대한 반성, 당시 강화도 관방 현황이 적의 공격에 대한 대비가 되지 않은 점, 관방정책이 미봉책으로 일관해온 점, 조정은 강화유수의 장계만 믿지 말 것이며 강화유수는 백성을 멀리하고 이서(吏胥)의 생각만 따르지 말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총론 부분은 「의진강도지소(擬進江都誌䟽)」와 더불어 강화도 방비에 대한 그의 고민과 대안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여조천도기(麗朝遷都記) : 1232년 최우의 강화천도에서부터 1270년 개경환도까지 사실을 기록하였다.
임진영담(壬辰零談) :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정철이 머물러서 전쟁의 화가 미치지 않았음을 서술하였다.
정묘록(丁卯錄) : 광해군 때부터 후금과의 외교 관계로부터 정묘호란 때 화의가 이루어지기까지의 사건을 각종 문헌에서 추려서 정리하였다.
병정록(丙丁錄) : 병자호란의 시작부터 그 이듬해 4월까지의 사건을 여러 문헌에서 추려서 정리하였다.
이상에서 간단하게 「강도지」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저서가 강화도에 관한 상당히 중요한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권영철로 그의 저서인 「병와 이형상 연구」에서 「강도지」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런데 그가 언급했던 상권 첫머리의 지도, 하권의 ‘정요(政要)’, ‘임장군전’, ‘일본국지’, ‘여진국지’, ‘몽고국지’ 등은 현재 「병와전서」에 포함된 「강도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원본을 확인해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번역하여 간행한 「국역 병와집」에는 부록으로 「강도지」가 수록되어 있는 데 번역보다도 교정과 체제, 어투 등에서 현재의 상황에 적절하지 못한 곳이 있고 ‘여조천도기(麗朝遷都記)’ 부분은 번역에서 누락되어 있다. 잘 알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것은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된다.
내용상으로 다른 강화도 지리지와 구별되는 「강도지」에서만 보이는 항목을 열거하면 파수, 돈황, 선박, 천정, 풍우, 적거, 축물 등과 임진영담, 정묘록, 병정록 등이다. 이런 항목을 추가한 것은 바로 강화도가 갖는 국방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여 병자호란의 전철을 밟지 않으면서도 적을 효과적으로 막으려는 그의 주도면밀한 개인적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체제에서 각 항목의 서술은 단순히 기존 문헌을 모아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직접 촌노나 늙은 아전 등에게 확인하여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목의 끝부분에 ‘사목(事目)’이라 서술된 내용에 관한 조정의 명령이나 강화부에서 올린 공문의 내용을 기록하여 그 변천 사항을 알아보기 쉽게 했으며 그 뒤에 선배들의 견해와 실제 답사를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이처럼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한 뒤에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덧붙이는 형태의 저술은 병와 이형상만의 글쓰기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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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지리지(읍지)의 편찬과 강화도 지리지
「강도지」가 조선시대 지리지(읍지) 편찬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의 지리지 편찬에 대해 개괄적으로나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조선시대에는 지리지와 지도가 활발하게 편찬되었다. 조선의 건국과 서울을 수도로 정한 이후 새롭게 변한 행정 구역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 세종대와 성종대에 「팔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의 전국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그리고 중종 26년(1531)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어 전국에 보급되면서부터 민간 차원에서도 자신의 지역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는 계기로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그러므로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국가 주도의 전국 지리지가 아닌 지역 단위로 수령이나 사림을 중심으로 지리지가 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읍지이다. 읍지는 각 고을의 지리지로서 지방 행정단위인 부, 목, 군, 현 등을 단위로 하여 작성된다. 이렇게 읍지가 작성되기 시작하는 것은 그 이전의 전국 지리지 제작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새로 구획된 행정구역이 이미 1백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각 지방의 역사와 전통을 정리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고 내용이 소략한데다가 과거의 지식 위주였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에 대해 불만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결과 16세기 이후 편찬된 조선시대 읍지는 1,000여 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 현존하고 있다.
이렇게 편찬되기 시작한 지방의 지리지는 시기별로 변화상을 보이면서 다양한 목적의식에서 편찬되고 있다. 16·17세기의 읍지는 경상도나 전라도를 중심으로 국지적, 산발적으로 편찬되나 내용이 풍부하고 사실적이다. 18세기에는 「여지도서」로 대표되는 관찬지리지가 많이 편찬되었고 19세기 초엽인 순조 이후 전국적으로 읍지 편찬이 확산되고 있다. 그리하여 관찬 읍지가 사찬 읍지를 압도하는 현상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인 고종대에 현존 읍지의 약 50%가 편찬되는데 그것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다음 국방의 필요성에 의해 제작되었고 1895년경에는 외국의 경제적 침략에 따른 경제적 목적에 의해 전국적으로 편찬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읍지는 과거의 읍지를 거의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 많아 사료적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아울러 조선시대 지리지를 그 내용과 성격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전국 지리 지와 지방 지지인 읍지이다. 그리고 관찬 지리지와 사찬 지리지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편찬 목적에 따라서는 지방통치자료, 향촌 질서 재편과 안정, 군현의 역사지리서, 군사방어, 교화와 윤리 등으로 분류 가능하다.
이런 조선시대의 지리지편찬에 있어서 「강도지」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먼저 사찬읍지로서의 「강도지」이다. 사찬읍지로서 대표적인 예가 1602년 안동에서 권기(權紀)가 중심이 되어 편찬한 「영가지(永嘉誌)」이다. 「영가지」의 편찬 과정과 그 가치는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지만 이것은 당시 안동의 사림들이 힘을 모아 편찬하였다. 그런데 반해 「강도지」는 비록 강화유수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형상이라는 개인이 거의 혼자 힘으로 완성한 책이라는 데에 그 가치가 있다. 개인의 힘으로 완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힘도 들었겠지만 체제나 내용에서 일관성을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강점이다. 또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도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후대에 편찬되는 어느 강화도 지리지보다도 내용이 풍부하고 체계적이라는 데에서 그 가치는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편찬 목적에 따른 「강도지」다. 「강도지」는 16·17세기에 변경 지방에서 편찬된 군사적 성격을 지닌 지리지에 포함시켜서 이해할 수 있다. 16·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에 군사 방어적인 측면에 목적을 두고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이런 읍지는 현재 함경북도 지역에 관한 「북관지(北關誌)」와 제주도의 「탐라지(耽羅誌)」가 대표적이다. 이런 지리지에는 각 조항에서 군사설비나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수록되었다. 이런 면에서 「강도지」는 전형적인 군사적 목적을 띤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강도지」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신증동국여지승람」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것의 체제에 따라 편찬되었지만 그것보다 지지(地誌)답게 정확성을 기했고 각 조항에서 내용을 기록한 다음에 장문의 사실과 자신의 견해를 붙였는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라서 실용적인 면에서 탁월한 저작이다.
다음으로 강화도 지리지 속에서의 「강도지」다. 「강도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이후 1759년에 「여지도서」가 간행되기 이전에 편찬된 유일한 강화도 지리지이다. 「여지도서」 이후 편찬된 강화도 지리지는 김노진의 「강화부지」(1783), 「강화부지」(1872), 「강화부읍지」(1881), 「기전영지(강화)」(1895)가 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박헌용의 「속수증보 강화부지」(1932)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여지도서」는 물론 김노진의 「강화부지」 이후 어떤 강화도 지리지에도 이형상의 「강도지」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아마 「강도지」를 숙종에게 올리려던 이형상의 시도가 좌절된 뒤 그의 서재에 묻혀 있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세간에서 「강도지」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권영철의 「병와 이형상 연구」(1978)가 간행된 이후인 듯 싶다.
[8]
- 조선후기 관방론과 강도지
「강도지」는 전형적인 군사 방어적 성격의 지리지이므로 그에 대한 역사적 의의는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후기에 조정의 주된 관심사의 하나가 외침 때 수도 서울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시대 상황의 변화, 당쟁의 역학 관계, 서울 방위의 우선 순위 등 다양한 요소가 고려되어 시대에 따라 그 방어 전략에 변화가 있었다. 이에 따라 강화도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고 있다.
강화도는 인조 때부터 크게 중시되어 경기 수영을 강화도로 옮기고 교동에 3도통어영을 설치하였 지만 효종 때에는 강화도에 진보를 설치하고 각 진보에는 무기를 갖추어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숙종 때에는 계속 진보와 돈대가 설치되어 모두 12진보 49돈대가 설치되었다. 아울러 염하를 따라 외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강화도 방어의 보조로서 갑곶 맞은 편에 문수산성이 축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편찬된 「강도지」는 강화도의 방어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쉽게 함락된 이유, 당시 축조되어 운영되고 있던 진보와 돈대의 방어 상황, 효종 때 북벌을 위해 강조되었던 목장의 운영,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필요한 물품과 도구, 화포의 제조 방법 및 사용 방법, 각종 화기의 장점과 단점, 적을 방어할 때 반드시 필요한 우물, 날씨의 변화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런 그의 편찬 의식은 그가 제주목사를 지낼 때 편찬한 「탐라순력도」와 「남환박물」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어서 일시적인 호기심이나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곧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지키려는 의식이 단순히 정치적인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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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 「강도지」의 가치
「강도지」는 한 지역의 지리지로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인용된 문헌의 외연이 넓다는 점이다. 「강도지」는 편찬될 때 민진주의 도움을 편찬되었다는 사실과 「강도지」에 인용된 「사목」에서 보이는 기록들은 강화유수부에 보관 중인 문헌을 보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내용들이 많으므로 강화도에 관해 가장 풍부한 자료를 수록하고 있는 지리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병와 이형상이 발로 직접 쓴 지리지이다. 그는 단순히 문헌만을 옮겨 적은 것이 아니다. 해적 유적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강화도의 노인이나 글을 아는 승려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까지 고증하여 실었기 때문에 1696년경의 강화도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셋째 아울러 강화도 출신이 아닌 그가 작성했기 때문에 상당히 객관적으로 서술된 점도 그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국방 차원에서 갖는 가치는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던 군사 지식과 실제 활용에 대해서 많은 역사적 실례와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점을 들 수 있다. 한 예로 문수산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 수 있다. 문수산성은 고립된 성곽이라 잘못하여 적에게 빼앗기면 오히려 강화도를 방어하는 데 곤란하다는 군사전략을 들고 있는데 우리들의 허를 찌른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장성이나 돈대의 축조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실제로 활용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므로 뛰어난 인재의 발탁, 진보 및 돈대의 효율적인 운용을 강조한 것 등도 탁월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을 볼 때 그는 문무를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실제 민란이나 도적 소탕 및 동래에서 일본인의 책략에 대한 그의 조치가 매우 현실적이고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몽고와 전쟁 때 강화도로 천도한 사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의 사실을 별도로 작성하여 붙인 점 등에서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그의 유비무환의 정신까지 읽을 수 있다.
이런 국방 의식만 반영된 것이 아니라 투철한 성리학자로서 자세도 드러나고 있다. 유교적 풍습의 정착을 추구하던 그의 의지가 드러난다. 특히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거나 절개를 지킨 인물들에 대해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서술한 점, 음사(淫祀)에 대해 단호하게 처리할 것을 적은 것 등에서 그가 성리학자이자 예학에 밝은 인물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강화도 역사와 문화의 연구에 끼친 영향이다. 강화도 지리지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김노진의 「강화부지」에는 불행히 「강도지」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이것은 「강도지」의 편찬 의도가 후대에 계승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후대에 끼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강화도를 연구하는 데에는 탁월한 가치가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형상의 「강도지」는 앞으로 많은 연구를 기대할 수 있는 숨겨진 자료이다. 앞으로는 기존의 강화도 지리지와 비교 연구가 진행되어 강화도 역사와 문화연구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조 이후 서울 방어전략의 변천과 강화도를 보장지로 삼으려던 방어 전략 등의 연구에도 활용되어야 할 것이며 사찬 읍지나 읍지 편찬의 역사에서도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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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권영철, 「병와 이형상 연구」, 한국연구원, 197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병와전서」 전10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정태헌 외, 「국역 병와집」 전3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김용걸 외, 「한국 사상가의 새로운 발견」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이정재 편, 「병와연보」, 청권사, 197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탐라순력도·남환박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양보경, 「조선시대 읍지의 체재와 특징」, 「강남대학교 인문과학논집」 제 4집,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