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디지털 아카이브 고도서 한문 원문·한글 번역

대명영렬전 [대명영렬뎐n1-8책] - 해제

G002+AKS-AA55_46798_000 【정의】 명태조 주원장의 창업을 그린 중국 역사소설. 8책. 필사본. 작자는 郭勛이라는 설이 있으나 분명치 않다. 한글본 『대명영렬뎐』은 明刊本 『皇明英烈傳』 6권을 18세기에 번역한 필사본이다. 이 소설의 원전인 嘉靖本은 현재 전하지 않고 만력 1591년 이전에 나온 것으로만 추정되는 판본 수종이 전한다. 【서지사항】 낙선재본 『대명영렬뎐』은 8권 8책으로 한 면은 10행 21자 내외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20.9cm 세로 29.2cm이며 표제는 한자로 “大明英烈傳”으로 되어 있고 藏書閣印이 찍혀 있다. 본문은 해서체로 정성들여 쓰여져 있다. 각권마다 1면에 소제목이 나열되어 있다. 권지일은 113면, 권지이는 112면, 권지삼은 109면, 권지는 103면, 권지오는 125면, 권지뉵은 106면, 권지칠은 112면, 권지팔은 96면 총 876면으로 이루어졌다. 낙선재본 『대명영렬뎐』은 8권 8책으로 되어 있다 민간 전사본으로는 박순호 교수 소장본과 聽雨齋 소장본이 낙질로 전한다. 朴順浩 교수 소장본은 애석하게도 권지오와 권지뉵 두 권만 남아 있다. 이는 낙선재본 『대명영렬젼』 권지육 권지칠과 같은 것이다. 원전의 작자 문제와 관련하여 종전에는 郭英의 후예 郭勛이 조상을 드러내기 위해 창작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영렬전』의 작자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은 내용 연변의 문제이다. 『皇明英烈傳』, 『皇明英武傳』과 『雲合奇踪』 3종을 종합해 보건대 『皇明英烈傳』 최초의 모본은 『皇明通紀演義』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원본은 전하지 않고, 『皇明英烈傳』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 이상 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체제 및 내용】 낙선재본 『대명영렬뎐』은 모두 57則으로 되어 있다. 줄거리를 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작품 중간 중간의 상주문, 시 등 고문의 번역을 생략하였으나 대체로 원문에 충실하였다. 『英烈傳』은 명태조 주원장의 창업을 그린 것으로 원말 난으로 각지의 의병이 봉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주원장이 영웅 호걸과 인재들을 끌어들여 원병에 저항하고 채석기와 남경을 함락시킨 다음 진우량 장사성 등 할거세력을 차례로 평정하고 중원을 점령하여 천하를 통일한 뒤 공신들을 녹을 봉하는 것으로 끝맺는 역사소설이다. 원나라 말년, 順帝가 황음과 실정으로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潁州의 劉福通, 蘄州의 徐壽輝, 徐州의 芝麻李, 泰州의 張士誠 등 열네 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원 승상 脫脫이 출정하여 토벌에 큰 공을 세웠으나 간신의 참소로 도리어 독살당하는 등 조정은 어지럽기 그지 없었다. 그때 옥황상제의 시중을 들던 金童玉女가 인간세상에 내려와 淮西 濠州 鳳陽府 皇覺寺에서 한 아이를 낳으니 이가 곳 명태조 朱元璋이었다. 太祖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꾀가 많은데다 힘도 세어 제왕의 기상을 타고 났으며, 열여덟 살 되던 해 외삼촌 郭光卿을 따라 金陵으로 烏梅를 팔러 가다가 鄧愈•湯和•郭英•吳禎 등을 만나 의기투합한 그들은 滁陽王 곽광경을 따라 滁州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丁德興•趙德勝•李善長•耿再成 등의 영웅들이 속속 모여든다. 태조가 예로써 선비를 대접하고 徐達을 대장군으로 삼아 첫 싸움에 원나라 군을 대파하자, 常遇春이 그의 휘하에 들어온다. 그후 제양왕 곽광경이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을 和陽王으로 세우고, 태조는 병마대원수, 서달은 원수가 된다. 태조는 여러 장수와 병사를 이끌고 금릉을 서울로 삼고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자 먼저 桐城과 湖口를 막아 원나라 장수 蠻子海牙의 십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강변에 이르러 선봉대장 상우춘이 단숨에 采石磯를 점령해 버린다. 그후 만자해아•陳也先 등을 차례로 목을 베고 금릉을 지키던 曹良臣의 항복을 받는다. 원나라 장수 達魯花赤은 福壽城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태조는 마침내 금릉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宋濂•劉基 등의 자문을 받아 장사성을 칠 계획을 세운다. 태조의 군사는 먼저 장사성의 참모 張士德과 장수 張九六 등을 사로잡고 趙打虎를 대패시킨 뒤, 常州•江陰 등지를 점령한다. 그리고 상우춘은 원나라 장수 朱亮祖를 귀순시킨다. 元 至正 18년에 화양왕이 병사한 뒤 중신들은 태조를 등극시키려 하나 태조는 아직 큰일을 이루지 못했음을 이유로 중신들의 청을 거절하고 계속 전투를 벌여 金華 등지를 점령하고 원나라 장수 胡深을 귀순시킨다. 그때 江州 徐壽輝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진우량을 시켜 江州의 왼녁 安慶府를 함락시킨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진우량이 倪文俊과 공을 다투다 서수휘의 문책을 받자 서수휘와 예문준을 죽이고 스스로 漢帝라 칭한 뒤, 張士誠과 연합하여 금릉을 치고자 한다. 이를 간파한 태조는 康茂才를 거짓 항복하는 체 시켜 그들의 성에 들어가 내통하게 하여 진우량을 밖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한다. 작전대로 그들을 대패시키자, 장사성 역시 蘇州로 도망간다. 달아난 진우량은 태조의 추격을 피해 武昌에서 장사성과 함께 다시 태조를 칠 계획을 세운다. 장사성은 먼저 安豊을 점령하고 태조를 끌어내어 전투를 벌이고 진우량은 그 기회를 틈타 금릉을 공격한다. 태조는 유기의 계책을 좇아 친히 진우량과 싸우다 파양호 어귀에서 진우량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그때 韓成이 태조의 옷을 바꿔 입고 물에 몸을 던져 빠져 죽음으로써 포위 군사를 풀게 해 위기를 모면한다. 태조는 유기의 계책에 따라 화공으로 진우량의 水寨를 공격하기로 하고 진우량의 부장 丁普勝으로 하여금 거짓 항복하는 체하게 하여 내응케 한다. 유기는 단을 높이 쌓아 바람을 일으켜 그 바람을 이용하는 화공전을 편다. 접전중 진우량이 접전중 곽영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으로 태조는 대승을 거두게 되자 鄱陽湖 康郞山 아래 충신묘를 세워 한성 등 36인을 추증한다. 그후 다시 장사성과의 접전에서 서달은 먼저 자신의 군사들이 주색에 빠져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것처럼 꾸며 그 모습을 일부러 적에게 노출시켜 泰州의 史彦忠을 끌어낸 뒤 그 틈을 타 태주를 점령한다. 이어 태조는 濠州를 점령하고, 상우춘의 군사가 장사성의 진영에 잠입하여 불을 지르자 장사성은 패주하고 만다. 서달이 직접 군사를 거느려 소주성을 공격하여 장사성을 사로잡자 장사성은 부끄러운 나머지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태조는 여러 장수들을 각각 포상하고 율령을 정하여 널리 반포한 뒤 무신 정월 사일에 정식으로 즉위하여 국호를 明이라 한다. 그 뒤에도 태조는 쉬지 않고 서달로 하여금 군사 십만을 이끌고 북벌을 하는 등, 湯和를 원수로 삼아 십만 군사로 陳友定을 쳐 閩廣을 점령하게 하고, 李文忠에게는 方國珍을 쳐 浙東 지방을 점령케 하고, 鄧愈에게는 兩廣 지방을 점령케 한다. 이문충은 방국진을 쳐 태주에서 항복받은 뒤 朱亮祖와 함께 延平으로 달려가 湯和를 도와 진우정을 친다. 원래 진우정은 의심이 많은 사람으로 싸우기도 전에 부하들이 많이 도망하여 성이 함락되자 명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혀 호심의 아들 胡禎에게 살해된다. 방국진 역시 붙잡혀 효수된다. 서달이 군사를 일으켜 山東을 치자 원나라 장수 擴廓帖木兒는 泰原으로 달아나고, 靑州의 普顔不花는 명에게 패하자 약을 먹고 자살한다. 산동을 평정한 서달은 그 기세를 몰아 河南을 취하고자 汴梁을 포위하여 李景昌과 팽팽히 맞선다. 거기다 상우춘이 군사를 거느려 洛陽을 치니 脫因帖木兒는 패하여 陜西로 달아난다. 명나라 군사가 중원을 점령하자 다급해진 원나라 조정은 확곽첩목아를 대원수로 삼아 河北을 지키게 하고 李思齊에게는 潼關을 나서 하남을 회복하게 하고, 승상 也速에게는 산동을 수복하게 한다. 그러자 서달은 변량의 포위를 풀고 먼저 이사제를 친다. 이사제는 목책을 쌓았다가 서달의 화공에 견디지 못하고 하남을 내어준다. 이때 태조가 대군을 이끌고 변량에서 서달의 군사와 합세한 뒤, 하북을 점령하고 연경으로 향한다. 서달의 군대가 直沽 해구에서 원 승상 야속의 군대와 한창 교전중일 때 주량조 등이 廣西를 함락시키고 달려오니 원나라 군사는 대패하고 만다. 그때 서달이 원순제가 주야로 환락을 즐기는 틈을 타 연경을 공격하니 마침내 연경이 함락된다. 그리고 순제가 죽은 뒤 大都를 北平府로 바꾼다. 태조는 다시 서달을 시켜 하북 여러 군현을 평정하게 하고 山西까지 진격하여 泰原을 함락하게 한다. 섬서를 지키던 이사제가 서달에게 항복하고, 慶陽의 張思道•張良輔 형제 역시 姚暉 부자에게 살해되니, 섬서는 모두 명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원 승상 야속 등이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居庸城 아래서 끝내 야속은 상우춘의 창에 찔러 죽게 되고 상우춘 역시 얼마 후 병사한다. 그리고 이문충이 大同을 점령하니 원군은 북으로 패주하고 태조는 중원과 남정에 공을 세운 장수들을 포상한다. 이후 유기는 지금의 승세를 놓치지 말고 남은 원나라 군사를 토벌할 것을 권하고, 이에 따라 태조는 서달을 정원대장군으로 삼아, 이문충•탕화 등과 함께 계속하여 북벌하도록 한다. 원제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병사하고, 원태자는 烏龍江을 건너 멀리 피신한다. 서달이 개선하자 태조는 鐵券으로 공신들을 봉하고 탕화를 시켜 蜀과 夏를 정벌케 한다. 成都城에서 夏丞相 戴壽는 명군과 수차례 격전 끝에 패하고 夏王 明升은 마침내 항복한다. 공을 이룬 유기가 조정에서 은퇴하여 낙향한 뒤, 雲南으로 내려가 梁王을 설득시켜 귀순케 하려던 待制 王褘가 원의 雪雪에게 살해당하자 격노한 태조는 傅友德•沐英 등으로 운남을 치게 한다. 먼저 貴州를 점령한 목영이 永寧을 손에 넣은 뒤 부우덕과 합세하여 양왕의 수하장수 達里麻 군을 이김으로써 마지막 남은 운남까지 평정된다. 이에 이르러 드디어 대명 천하가 통일되고 태조는 공에 따라 여러 장수들을 각각 제왕과 공후와 장수로 봉하여 각지에 주둔시킨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三國志演義』가 나온 이후 명 중엽에 나온 중국 역사 연의소설은 대개 20여 종 되는데 상고에서 명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 조대마다 통속 연의소설이 있었다. 이 시기의 장편소설의 흥성은 『英烈傳』과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英烈傳』은 다른 소설들보다 먼저 나왔으며 궁중에까지 전해지고 설화인의 강담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쳐 서적상들이 다투어 간행하였으며 역사소설의 창작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임란 전후로부터 이들 소설이 들어왔고 영정조 때 이르러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후 일반 사대부 학자들에 의해 읽히고 다시 대량으로 번역 전사되어 주로 궁중에서 비빈과 궁녀들에게 읽히고 나아가 사대부 집안의 유한한 부녀자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한글 번역 필사본 『대명영렬뎐』은 번역문의 고어와 고문체로 보건대 18세기에 번역되어 늦어도 19세기에 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다(猖狂) 가아다(掌) 거후르다(傾) 것지다(催/奪) 게다(貫) 다(備) 낫닫다(向前) 너흘다(亂) 누기다(緩) 니다(遣) 더다(夜宿) 더위다(攀) 막다(拒) 무으다(築) 뭉긔다(束) 뮞다(結) 밋브다(信) 바야다(迫逼) 벙으리왇다(拒) 븟치다(飛翻) 비기다(憑) 흐다/흐다(揮/刺) 셰다(立) 스치다(諳) 아쳐롭다(預) 어위다(寬) 업지다(倒) 외다(非) 이바지다(宴樂) 잇브다(勞) 즈다(壓) 나다(縊) 허외다(跑) 헤혀다(揭) 깃(巢) ㄴ(虀粉) 나조ㅎ(晩) 내(驏) 녀지이(耕) (囊) 머귀나모(梧桐) 무미(沒水) (繩) 잘(米囊) 이바지(款) 지(瓦) 등의 고어와 ‘곰(以), 갋, -거야, -다가, -도곤, -손대/-의숀대, -톄로’ 등의 고문체는 다른 낙선재본 번역소설 중 연대가 오랜 『빙빙뎐』,『삼국지』,『형셰언』, 『후슈호뎐』, 『성풍류』, 『선진일사』 와 더불어 18세기 국어학 자료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낙선재문고의 하나로 현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모두 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대명영렬뎐』은 낙선재 문고에 갊아 있는 번역소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아직 영인본은 나오지 않았다. 【참고문헌】 낙선재본 『대명영렬뎐』 연구 (朴在淵, 韓國中國小說學會,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