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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아문정비식 [各衙門情費式] - 해제

G002+AKS-AA55_25081_000 【정의】 【서지사항】 이 정비식의 작성자와 작성연대는 알 수 없다. 【체제 및 내용】 ‘정비(情費)’란 좁게는 관에서 세금 등을 수납하면서 이서(吏胥)들이 받았던 뇌물로 인정(人情), 정채(情債)라고도 하며, 넓게는 경사 아문들이 기관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받아 들였던 준조세였다. 정비의 시행은 조선후기 대동법 시행과 함께 곡물 유통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중간상인들과 경사 아전들이 담합하여 뇌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관례화되었고, 이것이 차츰 불법적으로 고착화되면서 중간유통업자들과 지방 세금수취자인 서리들이 그 정비에 들어가는 부담을 다시 백성에게 전가하면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조선후기의 정비(情費) 문제는 중대한 사회 문제였으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이에 대한 관례화가 조금씩 법적 효력을 갖게 되어 각 경사아문이 별도의 정비식(情費式)을 갖는 상태로까지 나아갔다. 정비식이 제정된 계기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이미 숙종년간에 우의정 민암(閔黯)이 아뢰기를 ‘속담에 우리나라를 가리켜 ‘인정의 나라’’라고 지칭하면서 그 폐해를 지적한 바 있었고,(『備邊司謄錄』숙종19. 11. 2) 순조년간에는 ‘서울과 지방의 이속(吏屬)에게 주는 정비(情費)가 해마다 증가’하는 폐단이 비변사에서 지적되었다.(『純祖實錄』卷14. 純祖11年. 3. 30) 헌종대에도 이 관습을 강하게 적발하려 하였으나 한시적 조처에 불과하였다. 그러자 아예 [戊戌節目]를 만들어 정비를 인정하고 정식화하였다.(『高宗實錄』卷11. 高宗11年. 3. 5) 그러나 정비의 제한적 활용에도 불구하고 과잉 수납이 그치지 않자 고종대에도 곡식은 10분의 1, 돈은 매 100냥마다, 무명·베는 1동당 5냥씩으로 한계짓도록 규정을 마련하게 하였다.(『高宗實錄』卷20. 高宗20年. 1. 26) 이는 원래 내야 할 곡물에 대한 정비를 원액의 10/1만을 내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아래 [각아문정비식]이 마련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정비식은 고종대 주장된 10/1 비율을 약간 상회하고 있다. [각아문정비식]에 나타난 호조, 선혜청, 총어영 등의 정비식 목차와 내용은 아래와 같다. 公作米 (每邑每船船下告米五斗) - 三手米 - 移劃大同米 - 戶曹 嶺南米元納太 每百石 (米十三石五斗八升五合 太六石三斗) - 戶曹 湖南米 元納太每百石 (米十四石五斗七升五合 太六石三斗) - 宣惠廳嶺南米 元納太每百石 (太十石十斗八升) - 宣惠廳湖南米 元納太每百石 (米八石十三斗六升六合) - 宣惠廳湖南米 元納太每百石 (米八石十三斗六升六合 太三石) - 摠禦營 結作米 - 摠禦營 移劃米 - 戶曹 嶺南太 - 戶曹 湖南太 - 宣惠廳 湖南太 - 宣惠廳 嶺南太 [각아문정비식]은 직방형의 표에 곡물(쌀과 콩)의 양에 따른 정비의 양을 기재하였는데, 가령 헌종 10년(1844) 결작전(結作錢)의 일부를 쌀로 받아들였던 공작미(公作米)의 경우 100석(石)에 해당하는 정비(情費)는 14석 7두(斗) 7승(升) 5홉(合)으로 10분의 1기준을 상회하였다. 그리고 호조에서 영남과 호남에서 각각 거두어들인 쌀과 콩(太)의 양을 비교하면 호남이 영남보다 약간 더 과중하게 정비를 거두어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이 문서는 조선후기 사회의 정비(情費)라는 공공기관의 불법적 수취 행태가 각 경사아문에서 고착화되면서 나타난 자료이다. 19세기 조선사회에 나타난 삼정의 문란 중 전정(田政)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이자 국가 수취 운영의 실패를 나타내는 대표적 자료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備邊司謄錄』. 『肅宗實錄』. 『憲宗實錄』. 『高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