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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자인현일록 [慶尙道慈仁縣日錄] - 해제

G002+AKS-AA55_23608_000 [1] 「慶尙道慈仁縣日錄」은 오횡묵(吳宖黙)이 자인현감으로 재직하며 1888년(고종25 戊子) 8월 2일에서부터 1889년(고종26 己丑) 7월 15일까지 자인현의 행정업무에 대한 기록과 대물, 대인, 송인 등에 대한 시부를 일기체로 기술한 기록 내지 일록이다. 자인(慈仁)은 경산시의 동쪽에 위치한 면이다. 면적 22.03㎢, 인구 8,449명(1999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북사리이다. 옛날의 노사화현 또는 기화현(其火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자인현으로 개칭하여 장산군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 때 경주부에 속했다가 조선 인조 때 복현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산군에 합병되어 자인면이 되었다. 북동부에는 도천산·금학산·삼악산 등이 면계를 둘러싸고 있고 남·서부에는 압량면·남산면과의 경계를 따라 금호강의 지류인 오목천이 흐르며 오목천평야를 형성하였다. 총경지 면적은 10.90㎢로 49.2%, 임야 면적은 6.84㎢로 30.9%, 기타 19.9%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3.56㎢로 32.7%를 차지하고 밭이 7.34로 67.3%를 차지하며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평야지대에서 쌀이 생산되며 사과와 채소 재배가 성하고 양봉·양계와 젖소·돼지·사슴 등의 사육도 성하다. 서부리의 소전거리에는 40년 전부터 우시장이 섰다. 도로는 언양~우보간의 지방도, 밀양~경산간의 지방도, 자인~대창간의 군도가 면의 중앙부에서 교차하고 있으며 대구로의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교촌리에 고분군과 자인향교가 있고 지금은 메워진 버들 못 옆에 한장군이 내리쳤다는 ‘검흔석(劍痕石)ꡑ이 남아 있다. 서부리에는 한장군묘와 사당과 있다. 울옥리는 함양박씨의 동족마을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북사(北四)·동부(東部)·서부(西部)·교촌(校村)·읍천(邑川)·신도(新島)·신관(新官)·단북(丹北)·울옥(蔚玉)·옥천(玉川)·원당(元堂)·계남(桂南)·계림(鷄林)·일언(日彦)·남촌(南村)·남신(南新) 등 16개 동리가 있다. 지은이는 오횡묵(吳宖黙)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조선말기 문신,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며 자는 성규(聖圭),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여수군수 등을 거쳤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학문과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특히 시창작에 뛰어나 평민 출신 시인들의 모임인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오횡묵의 주요저작으로는 다음 책들이 있다. [2] 1887년(고종24丁亥) 3월 5일-1888년(고종25 戊子) 8월 23일: 「강원도정선군총쇄록(江原道旌善郡叢鎖錄)」(K2-4203) 1888년(고종25戊子) 8월 2일-1889년(고종26 己丑) 7월 15일: 「경상도자인현일록(慶尙道慈仁縣日錄)」(K2-3608) 1889년(己丑)-1893년(癸巳): 「경상도함안군총쇄록(慶尙道咸安郡叢鎖錄)」(K2-4209) 1893년(고종30癸巳) 正月 29일-1894년(고종31 甲午) 11월 26일: 「경상도고성부총쇄록(慶尙道固城府叢鎖錄)」(K2-4208) 1894년(고종31): 「여재촬요(輿載撮要)」(K2-4184; 귀B15AA 8) 1895년(고종32乙未) 2月-1897년(광무1丁酉) 5월: 「전라도지도군일록(全羅道智島郡日錄)」(K2-4299) 1898년(광무2): 「총쇄록(叢鎖錄)」(귀K2-6566) 1899년(광무3): 「춘우실실기전(麗水郡誌全)」(B15BB 10) 1901년: 「춘우실실기전(春雨室實記全)」(B91 50) 1905년(광무9): 「공상소 실록전(工桑所實錄全)」(C6A 8) 고종연간: 「승제습유(勝題拾遺)」(귀B15 AB 10)「茝園集」 [3] 이 책은 지리류로 분류되지 않고 사부(史部)-정서류(政書類)-기타관아일기(其他官衙日記)로 분류되어 있다. 사본(寫本)이며 사년(寫年)은 미상이다. 1책 130장이며 채색 지도가 있다. 반곽은 없으며 무사란이다. 반엽은 14행 32자, 주쌍행, 무판심이다. 크기는 세로 35×가로 25.2cm이며 장철은 선장(線裝)이다. 표제는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이며 오른편 상단에 무자(戊子:1888), 기축(己丑:1889)이라는 간기가 있다. 권수제는 경상도자인현일록이다. 첫번째 쪽에는 경상도 자인현 도형이 자리한다. 지도에는 사방경계의 지명, 강, 산, 도로가 채색되어 있다. 면, 리, 절, 고개, 사우, 연못, 향교, 정자, 숲, 묘우(韓廟), 서원(觀瀾書院)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다음으로는 일기의 내용이 시작되어 총 130쪽 분량이다. 각 면의 왼쪽 상단에는 연기와 월기가 표시되어 있다. 일기는 날짜별로 기술되어 있으며 주로 하루하루의 기록과 그 감회를 적은 시부(詩賦)로 이루어져 있다. 기사, 시, 공문서 등은 독자가 구별하기에 편하도록 1자 들여쓰기를 했다. 중요한 부분과 시률(詩律)의 운자(韻字) 및 그 대자(對字)에는 주사(朱砂)를 가지고 방점(傍點)으로 표시했다. 무자 8월 5일 기사에서의 자인현감을 제수받고 쓴 유감술회(有感述懷) 시가 그 예이다. 인명(人名)에는 영표(零標)를 사용하여 표시했다. 무자 팔월 4일 자신과 자인현감 이규학(李圭學)의 상환(相換)을 기록할 때 각각 자신의 이름과 이규학의 이름자 옆에 영표를 사용하고 있다. 지명(地名)은 종선(縱線)으로 표시했다. 무자 8월 2일 기사에서 정선에 종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누, 정, 대, 당(樓亭臺堂) 등 건물명과 중요한 관청에 대해서는 파선(波線)으로 표시하여 읽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일록은 임금의 부름을 받아 대궐을 방문하자 하교하길 ‘정선군수가 정장(呈狀)을 제출하여 체직을 청하고 물러갔는데 다시 신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는 소지(所志)를 이조에 전달했다.’”는 1888년(戊子) 8월 2일 일기로 시작된다. 8월 4일 정선군수 오횡묵과 자인현감 이규학이 상환(相換)되었다는 기사가 이어진다. 8월 5일 하교에는 ‘자인현에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 너를 제수하니 서둘러 내려가라’는 내용이다. 저작 오횡묵이 자인현감에 제수된 정확한 내용은 이 날짜의 일기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통상 지방관이 새로 임명되면 신정(新廷)이라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전인(專人)이 자인현에 통보를 하면 마부(馬夫)와 수배(隨陪)ㆍ통인(通引) 각 1인, 관노(官奴)ㆍ사령(使令) 각 1명이 그 날 어둡기전에 대령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정이다. 신정에 대한 더 구체적인 기사는 8월 19일 기사에 나온다. “자인의 문안사(問安使)가 상래(上來)했다. 호장(戶長) 최장우(崔章瑀), 이방(吏房) 金楨河, 부호장(副戶長) 이기승(李基昇), 부이방(副吏房) 문찬주(文燦周), 행수군관(行首軍官) 문장복(文章馥), 좌우병방(左右兵房)ㆍ군관(軍官) 이윤근(李潤根)ㆍ신만수(申萬壽), 수형리(首刑吏) 석태근(石泰根) 등이 백청(白淸) 1되(升), 포(脯) 1첩(貼), 소주(燒酒) 3선(膳)을 읍의 예에 따라 내납(來納), 문안(問安), 고목(告目)했다. 따로 신칙ㆍ수호를 가하는 일과 신정할 때 제반 거행은 한결같이 두는 뜻으로 제송(題送)했다.” 오횡묵은 자인현감을 제수받고 곧바로 임지로 도임하지 않았다. 예궐하여 사은하기도 하고, 정선(旌善) 병방색리에게 인신(印信)을 건내주고, 조상의 묘에 성묘하기도 하고, 신정절차를 거치고, 예궐하여 발행을 품하는 등 약 1달간은 발행차비를 하는 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그가 발행하는 날짜는 9월 7일이다. 그가 서울에 서 출발하여 자인에 도착한 날은 9월 16일로 꼭 9일이 걸렸다. 발행기간 중 여정과 경상감영에 대한 기록이 매우 자세하게 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도착한 날에는 여정을 기록하고 자인현의 지리를 정리했다. 그리고는 사정(査政)으로 각 면리의 호수, 인구를 기록하고 술회시 1편을 실었다. 지은이가 자인현의 사정을 마친 것은 11월 23쯤으로 보인다. 11월 23일자 기록에 자인에서 목격한 전후사정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하나로 통합하여 부록한다는 기사와 함께 자인현지에 조응하는 자세한 지지를 수록하고 있다. 마지막 일기는 1889년(고종26 己丑) 7월 15일의 일기이며 지은이가 이배(移拜)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술이 없다. 다만 「경상도함안군총쇄록」 1889년 3월 9일 기사에 “함안군수를 이배시키는 데 수망(首望)이 오횡묵, 부망(副望)이 김병만(金炳萬), 말망(末望)이 김순주(金舜柱)”라는 기록만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과만(瓜滿)으로 인해 이배인 듯하다. 지은이는 자인현감으로 재직시 공사의 사건에 대한 실태, 그 사건들의 집행과정, 보고과정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그에 따른 본인의 감회를 시로 남겼다. 그 양은 약 136여편에 이르며 율시(律詩), 부(賦), 고시(古詩), 가사, 구점(口占), 차운(次韻) 등 다양한 형식을 띠고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혼란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며 살아가는 삶, 내직이 아닌 외직생활을 하는 관인으로서의 생활, 어느 한 시인으로서의 관직생활, 외직을 전전할 수 밖에 없는 개인적인 삶 등 지은이의 삶이 주는 무게의 무거움과 그런 무게를 철저히 깨뜨리려는 지은이의 내면적 고민들이 그의 시에 녹아 있다. 결국 이 일록은 한 명의 문신이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치민, 목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자기수양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지방관의 이취임에 대한 복잡한 의식절차와 지방행정의 실제 모습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왕조말기의 혼란한 시대상과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지방관으로서의 지은이 오횡묵의 공적인 고심, 개인적인 고민들을 이 일록은 우리에게 제기한다. 지은이가 자인현감으로 재직시 지방관으로서의 고민, 즉 흉년으로 인해 잠 못 이루며 쓴 1888년 9월 30일의 술회시(是夜 耿耿無寐 賦詩以述懷)로 마지막을 대신한다. 慈仁太守欲慈仁, 殫盡心誠未恤民. 一歲兩功僧䯻貴, 九月穡事龜毛貧. 聞三千里豊兼匈, 嘆七十村秋似春. 統計公私何以奈, 老農白首說酸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