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2_je_a_vsu_23465_000G002+AKS-AA55_23465_000 【정의】 【서지사항】 본 등록의 표제는 ‘皇明時槐院謄錄’이고 권수제는 ‘槐院謄錄’이다. 표제에 보이는 ‘槐院’은 승문원의 별칭으로 승문원에서 제작된 각종 외교문서를 수록하고 있다. 표제 아래에는 ‘第一’부터 ‘第十二’까지 해당 책수 표시가 되어 있고 표지 우측 상단에는 각각의 책이 수록하고 있는 문체의 종류를 명시하고 있으며 우측 하단에는 ‘共十三’이라 하여 전체 책수를 보여주고 있다. 본 등록은 필사본으로 장정은 線裝이다. 13책 중 12책이 현전하는데 제13책이 결락되어 있다. 광곽은 四周雙邊이고 반곽의 크기는 28.4×18.5cm이며 罫는 烏絲欄이다. 반엽은 11행 22자이며 판심에 內向二葉花紋魚尾가 보인다. 주석은 쌍행으로 되어 있는데, 각 작품의 제작 시기와 작자 등을 명시하고 있다. 작자가 분명치 않은 경우에는 ‘無名’이라 적고 있고, 혹은 ‘在前作下’나 ‘在某某作下’와 같은 방식으로 본 책의 저본이 된 책에 실려 있는 순서를 대신 기록하고 있다. 2책의 서두에 실린 「聖節方物表」에 ‘在申欽作下’라는 주석을 달고, 다시 “原本의 姓名과 懸註가 매우 분명치 못하여 이 책을 분류함에 또한 앞 글에 의지하여 보기 어렵다. 지금 성명이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아울러 이와 같은 예에 의거하여 주석을 가하겠다. 그리고 더욱 의거할 바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無名’이라 주석을 달겠다.”라는 주석이 보인다. 이와 같은 예라는 것은 ‘在申欽作下’와 같은 주석 방식을 가리킨다. 書眉에는 작자나 본문의 내용, 혹은 글자에 대해 교감을 가하는 부분이 간헐적으로 보인다. 작자나 글자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槐院舊謄錄’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 “괴원구등록에는 누구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혹은 “某字는 구등록에 某字로 되어 있다”라는 방식으로 씌어져 있다. 나머지는 누락된 부분을 추정하기도 하고, 글자를 교감하기도 하며, 혹은 작품 사이의 내용의 유사성을 들며 초본과 수정본의 관계로 비정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槐院舊謄錄’을 저본으로 하여 이를 문체별로 새로 분류하는 작업을 수행했고 이때 교감 작업까지 아울러 수행하여 본 등록을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중간에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은 백지가 보이는 것은 추후의 보궐작업을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구체적인 필사 시기나 필사 과정을 드러내는 여타의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본 등록이 싣고 있는 가장 늦은 시기의 글이 1637년(仁祖15)을 전후해 지어진 점과 표제에서 ‘皇明時의 승문원 등록’임을 표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단 明 나라가 패망한 이후에 지어진 것임을 틀림없다. 아래서 언급하겠지만 『정조실록』에 수록된 괴원등록에 대한 기사를 참조해 볼 때 본 등록은 1800년(정조24)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敬奉閣에 수장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체재 및 내용】 본 등록은 명나라와 조선이 事大라는 중세의 보편적 질서 속에서 긴밀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던 鮮初부터 17세기 전반기까지 조선에서 제작한 각종 외교문서를 문체별로 싣고 있다. 1책과 2책은 表文와 箋文을 싣고 있고, 3책부터 5책까지는 奏文을, 6책과 7책은 咨文을, 8책과 9책은 揭帖과 檄文을, 10책부터 12책까지는 呈文과 箚子, 上書, 帖文 등을 각각 싣고 있다. 1책은 1403년(태종3) 權近이 제작한 표문을 필두로 하여 卞季良 10편, 尹淮, 趙末生, 無名氏, 兪孝通, 李季甸, 崔恒 7편, 金安國 30여편, 申光漢 10여편, 李滉 4편, 奇大升 7편, 李珥, 具鳳齡, 崔岦 10편, 吳億齡, 李德馨, 李好閔 4편, 金尙容, 李廷龜 15편, (李)爾瞻 8편, 鄭經世 6편, 李晬光 2편, 李慶全 2편, 申欽 9편, 李安訥, 金尙憲 2편, 洪瑞鳳 2편, 南以恭, 趙希逸 2편, 鄭廣成, 李埈 2편, 鄭弘溟 4편, 李志完 6편, 金光炫, 李敬輿, 張維 14편, 李植 9편, 鄭百昌 14편, 崔鳴吉, 李明漢 5편, 李昭漢, 李景曾 3편, (李)大燁, 趙重呂, 蔡裕後, 趙贇, 尹墀, 尹坵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이첨과 그의 아들 이대엽의 경우에는 姓을 제외한 채 이름만 적고 있다. 2책의 표문은 본 등록의 저본이 된 구등록에 저자가 명시되지 않은 것이나 윗글과 연계되지 않는 것을 따로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유사한 제목을 가진 것들을 분류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方物表, 聖節表, 冬至表, 進賀表 등과 같은 분류 체계로 구분하고 있다. 작자가 명시된 것만을 살펴보면, 洪麟祥, 이수광, 오억령, 李海壽, 이이첨, 柳夢寅, 李志完, 尹暉, 李德一, 李敏求, 金壽賢, 朴鼎吉, 장유, 이명한, 金蓍國, 李基祚, 金光炫, 최명길, 윤지, 홍명구, 睦大欽, 洪命元, 李慶全, 윤길, 金止男, 이준, 蘇光震, 柳忠立, 柳活, 柳希亮, 이소한, 李景義, 具鳳瑞, 朴東亮, 정경세, 洪慶臣, 신흠, 鄭廣敬, 李聖求, 金地粹, 李景奭, 沈之源, 김상용, 金時讓, 尹知敬, 李尙毅, 黃愼, 尹昉, 이경전, 尹義立, 柳希奮, 柳根, 李信元, 吳靖, 蘇光震, 閔德男, 吳翊, 이정구, 朴弘道, 裴大維, 洪命亨, 柳慶宗, 李信元, 任章, 徐景雨, 朴鼎吉, 沈光世, 이덕형의 작품이 있다. 3책은 金安國의 『請遣子弟入學奏』와 『收買弓角奏』을 시작으로 기대승의 『辨誣奏』, 李珥의 『奏本』, 유성룡의 『乞頒示會典奏文』과 『陳倭政奏文』∙ 『陳賊情奏文』∙ 『陳本國開府經理便否奏文』, 최립의 『辛卯奏』∙ 『奏謝恩』∙ 『奏戰功』, 이호민의 『復平壤獻捷奏文』∙ 『復開城後奏捷文』∙ 『李提督辨誣奏本』이 수록되어 있고, 4책에는 이호민이 제작한 10편의 주문이 연이어 차제된 후, 이정구의 『辨明奏』 등 4편이 실려 있다. 5책에는 贊畫 丁應泰의 奏本이 가장 먼저 실려 있는데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 한 것이었다고 무고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변무를 논리정연하게 펼치는 이정구의 『丁主事應泰參論本國辨誣奏』가 연이어 실려 있고 『皇朝覆題』∙ 『兵部咨文』 또한 함께 실려 있다. 이외에 이정구의 奏文이 8편 더 보인다. 이후 『陳慰奏文』 등 정경세의 주문이 2편 차제되어 있고 신흠의 주문 2편, 홍서봉 1편, 장유 4편, 이식 1편, 최명길 1편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6책에는 최립의 『咨回宋經略應昌』을 시작으로 최립 12편, 이호민 8편, 이정구 15편이 실려 있고 7책에는 『都督回咨』 등 정경세의 자문 2편, 신흠 14편, 趙翼 1편, 장유 25편, 이식 3편, 최명길 1편이 각각 보인다. 8책에는 『邢軍門前揭帖』 등 윤근수의 게첩 2편, 최립 19편, 이호민 15편, 이정구 55편이 수록되어 있고, 9책에는 다시 이정구의 게첩이 13편, 정경세 6편, 신흠 12편, 김상헌 6편, 金德謙 5편, 장유 45편, 이식 24편, 이명한 25편이 실려 있으며, 부록으로 이정구의 계문 2편과 장유와 이식의 격문이 한 편씩 보인다. 10책에는 유성룡의 呈文 5편과 최립의 정문 30편이 실려 있고, 11책에는 이정구의 정문 8편, 정경세 5편, 이수광 1편, 신흠 2편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김상헌의 정문 4편과 이에 따른 명나라 예부의 題本, 『奉聖旨』가 실려 있고, 다시 김상헌이 제작한 정문 몇 편과 兵部의 題本, 『奉聖旨』, 『軍門批』 등이 보이며, 趙翼의 정문 2편, 장유 2편, 이식 1편, 이명한 2편, 金堉 3편이 각각 차제되어 있다. 마지막 12책에는 高敬命의 『上禮部尙書書』, 이덕형의 정문 3편, 이호민 26편, 姜沆 3편이 수록되어 있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1799년(正祖23) 7월 24일 승문원 제조 李書九가 皇朝 때의 문자로 책자를 만드는 문제에 대해 건의한 바 있는데, 槐院에 있는 『謄錄』을 가져다 보니 황조 때의 表, 箋, 奏, 咨, 呈, 揭 등 상당한 양의 문건이 수집되었으나, 두세 권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승문원 관원과 제술관, 이문학관 중에서 적격자를 선발하여 야사나 개인 문집 등을 두루 찾아 기록하여 한 책자를 만들고 이를 활자로 찍어 敬奉閣과 史庫 등에 봉안해야 한다는 것과 이에 대한 정조의 승인이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듬해인 1800년(정조24) 5월 10일에 정조는 敬奉閣에 봉안한, 괴원에서 올린 사대문서 및 명나라 당시의 『吏文謄錄』 15권을 친히 봉심하고 명나라 때 제작된 『槐院謄錄』 12권을 한 궤짝에 넣어, 봉안한 책장 가운데 제1층 고칙궤의 왼쪽에 안치하였다 한다. 그리고 『괴원등록』이 본래 13권이었는데 1권이 없어졌다는 기록이 함께 보인다. 이를 통해 1800년 『괴원등록』을 경봉각에 봉안했을 당시에 이미 1권이 일실된 상태였으며, 한 해 전인 1799년부터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는 보궐 작업을 승문원의 주도하에 수행하였으나 정조의 승하로 작업이 종결되지 못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이때 경봉각에 봉안된 괴원등록은 본 등록으로 여겨지는 바, 바로 ‘槐院舊謄錄’을 저본으로 하여 이를 문체별로 새로 분류하고 교감까지 이루어진 상태의 것이었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본 자료는 승문원의 옛 등록을 활용하여 후대에 편집한 것이므로 엄밀한 의미의 등록이라 할 수 없으나 여러 방면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서적이다. 조선시대에 있어 詞章과 文章의 존립 의미는 외교적 필요성에 상당한 무게가 실려 있다. 본 등록에 수록된 문서를 제작한 이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장가였고 이 때문에 승정원에 배속되어 외교문서를 제작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의 시대가 봉착한 중대한 외교적 사안에 대해 자신의 문장력을 총동원하여 국가의 외교적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본 등록은 15세기에서 17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200여 년의 기간 동안 조선 조정이 고민했던 각종 외교적 현안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거니와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임에도 불구하고 문집이 전하지 않거나, 혹 전하더라도 문집에 수습되지 않은 글들을 상당수 수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장 수사학을 고구할 수 있는 자료로 여겨진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본 등록과 동일한 내용을 싣고 있는 다른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규장각에 『槐院謄錄』(규 27013)이라는 제명으로 承文院의 업무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수록하고 있는 기간이 1764년(영조40)부터 1775년(영조51)까지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서울대학교도서관, 198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인물대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藏書閣所藏儀軌解題』(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藏書閣所藏謄錄解題』(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외규장각 의궤 조사연구』(외교통상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