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2_je_a_vsu_22602_000G002+AKS-AA55_22602_000 [정의] 1761年(英祖37) 10월부터 1762年 2월까지 王世孫(후의 正祖)과 世孫嬪 金氏(金時黙의 女, 1753~1821, 후의 孝懿后) 사이의 가례행사의 전말을 기록한 의궤이다. [체재 및 내용] 目錄은 座目, 啓辭 附世孫冊嬪儀續覽, 禮關, 移文, 來關, 稟目, 甘結, 書啓, 論賞·附 儀軌, 一房, 二房, 別工作, 修理所 등의 순서로 적혀 있으나 실제 편집은 이와 달리 一房, 二房과 班次圖가 第2冊에 있고 別工作과 修理所儀軌가 第1冊에 포함되어 있다. 「座目」에 해당하는 1761年 10月 30日의 「吏曹別單」에는 이례적으로 都提調는 없고 提調가 南泰齊 등 2인이며, 기타 都廳 2인, 郎廳 3인의 명단이 있다. 世孫嬪 三揀擇은 1761年 12月 22日에 거행되어 監司 金時黙의 딸을 간택하였으며 12월 26일 納采, 다음해 1월 3일 納徵, 1월 7일 告期, 1월 8일 冊嬪, 2월 2일에 親迎과 同牢宴이 거행되었다. 「一房儀軌」내에는 造禮器尺, 營造尺, 布帛尺半 등의 圖式이 있으며, 「二房儀軌」 끝에 18면의 彩色班次圖가 있다. 이 의궤는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王世孫의 嘉禮都監儀軌라는 점이 啓辭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금번 王孫嬪의 朝見禮는 300年만에 처음있는 일이다. 그날의 大殿과 中殿의 朝見禮는 光明殿에서 행하고 世子宮의 朝見禮는 祥輝堂과 興政堂에서 행하고 輦輿는 興明門으로 들어오라는 분부가 계셨다.” 가례 행사 자체는 「國婚定例」가 찬술된 이후 이를 의식해서 간소하게 치르려는 의도를 보인 듯 「啓辭秩」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이고 있다. “(왕이)명하되 옛 학자들이 이르기를 ‘혼인에 있어서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나 야만인들의 할 짓이다’ 라고 한 것은 格言이며 마음속에 항상 새겨둘 만하다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 조정은 검소한 덕을 서로 물려받는데 있어서에랴. 漢史 역시 높이 올린 머리와 넓은 소매는 나무랄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요즈음 사치풍조가 날로 성행하는 때 마땅히 王公으로부터 (儉德을) 시범 보여야 하지 않은가.” 이에 따라 혼례 용품도 가능한 한 기존의 물품을 사용하도록 하고 服制에서 同牢宴에 사용되는 雙耳單葉盞만 純金으로 하고 다른 기물들은 鍍金으로 하는 등 검소하게 치르도록 하고 있다. 병풍의 新造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세 사람의 屛風匠이 一房 工匠秩에 열거되어 있어 이전의 병풍을 수리해서 사용한 듯하다. 一房과 二房에서 종사한 모두 8人의 화원들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1759年의 가례 때와 비슷한 명단이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반차도」는 1759年 英祖 가례시의 반차도의 새로운 형식을 따르지 않고 王世孫嬪의 행렬만을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반차도에 비해 새로운 요소들이 등장하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우선 敎命腰輿의 앞에 보이는 향로를 안치한 조그마한 구조물인 香龍亭이 그것이다(奎章閣 마이크로필름 p. 138-2). 이것이 冊嬪과 親迎儀사이에 치르는 臨軒醮戒 의식을 강조한 결과로 추정된다. 이후의 가례 반차도에는 대개 香龍亭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竹冊腰輿 다음에 등장하는 銀印彩輿이다. 王世子嬪 冊嬪 時에는 玉印이었으나 王世孫嬪은 銀印을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렬의 거의 후미에는 왕세손의 교육을 담당한 講書院(世孫講書院의 약칭)과 호위를 담당한 衛從司의 관원들이 등장하는 것도 다른 점이다. 이들의 존재로만 보아도 이 반차도가 왕세손의 가례 반차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장현황 및 이본관계]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王世孫의 가례 기록이다. 이 의궤는 현재 규장각에 太白山 史庫本(奎13114)과 五臺山 史庫本(奎13115)이 있고 御覽用은 현존하지 않는다. 藏書閣 소장본은 표지에 “嘉禮都監儀軌(王世孫=正祖) 全”이라고 되어 있으나 完帙로 남아있는 규장각 소장 太白山本과 비교해 보면 2冊 중 上冊에 해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