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2_je_a_vsu_22590_000G002+AKS-AA55_22590_000 [정의] 1681年 肅宗(在位: 1674~1720)과 繼妃 仁顯王后 閔氏와의 嘉禮 행사에 대해 기록한 의궤이다. [체재 및 내용] 朝鮮朝에서는 궁중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三政丞(領議政, 左議政, 右議政)을 都提調로 한 都監을 설치하여 모든 일을 진행하고 그 행사가 끝나면 행사의 顚末을 기록한 「○○○ 都監儀軌」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때 내용이 같은 의궤를 행사에 따라 3件 내지 8件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御覽用은 매우 질이 좋은 草註紙에 붉은 줄(朱絲欄)을 긋고 글씨를 正字로 썼으며, 裝幀 역시 雲紋大段이란 비단을 사용하고 豆錫裝으로 국화모양의 장식 못인 菊花童具를 사용하였다. 기타 다른 건은 각 史庫分上用, 禮曹, 春秋館, 혹은 세자와 관련된 행사일 경우 世子 侍講院 등 관계 기관 비치용을 만드는데 이들은 線裝으로 하고 닥나무로 만든 楮註紙에 검은 줄(烏絲欄)을 쳤다. 이러한 체제가 正祖 代까지 계속되었는데 정조는 「園幸乙卯整理儀軌」(1795年)와 「華城城役儀軌」(1800年)를 整理字 활판인쇄에 목판화를 첨가하여 다수 출간하였다. 이처럼 의궤를 活字化하고 無彩色 木版 揷畵를 게재하는 관행은 그 후 進饌, 進宴에 관한 의궤에서 답습되었으나 대부분의 다른 의궤들도 正祖代 이후에는 다시 필사본으로 만드는 체제로 돌아가 조선조 말기까지 그대로 계속되었다. 壬辰倭亂(1592年) 이전의 모든 儀軌 典籍은 소실되었으며 丙寅洋擾(1866年) 이전의 御覽用儀軌는 현재 거의 대부분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남아 있다. 韓·佛間의 의궤 반환 협상은 현재 양국 간 외교 懸案으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嘉禮都監儀軌는 王, 王世子, 王世孫, 皇太子의 國婚을 치르는 동안의 준비과정과 行禮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여러 가지 啓辭와 傳敎, 文牒들과 아울러 소요된 經費, 物目 등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嘉禮都監儀軌에는 嘉禮都監의 설치에서부터 任員의 構成, 分署別業務의 내용, 六禮의 節次, 禮物의 品目, 王과 王妃의 服飾單子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특히 親迎, 또는 詣闕 時의 班次圖가 그려져 함께 冊으로 제작된다. 현존하는 가례도감 의궤 가운데 가장 연대가 이른 것은 昭顯世子의 가례행사 기록인 1627年 의궤(「嘉禮都監儀軌」 藏書閣所藏本 藏2-2592)이다. 이후 1906年(光武10)에 거행된 純宗 嘉禮의 「嘉禮都監儀軌」에 이르기까지 279年동안 제작된 20件의 의궤가 현존한다. 이들 20件의 儀軌는 國王의 嘉禮 9件, 王世子의 嘉禮 9件, 王世孫의 嘉禮 1件, 그리고 皇太子의 嘉禮 1件으로 분류된다. 英祖 20年(1744)에 거행된 「王世子(思悼世子)嘉禮都監儀軌」까지의 10件은 각각 1冊으로 구성되었으나, 그 이후의 의궤는 모두 2冊으로 되어있다. 嘉禮에 관한 여러 제도는 朝鮮王朝 初期에 형성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修正과 補完을 거치게 되었다. 이에 따라 嘉禮都監儀軌도 그 내용이 상세해지고 분량도 늘어나게 되었다. 國初에 「世宗實錄」과 「國朝五禮儀」(成宗 5年, 1474)에 제정된 嘉禮의 의식절차는 六禮로서, 王의 嘉禮는 納采[청혼], 納徵[청혼수락], 告期[혼인날짜 통보], 冊妃(嬪)[비,빈 책봉], 奉迎[使者를 보내 신부를 맞아들임], 同牢宴[신랑, 신부가 잔을 주고받는 의식]의 여섯 가지 의식이고, 王世子 가례는 納采, 納徵, 告期, 冊嬪, 親迎(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친히 맞이하는 의식), 同牢宴의 六禮儀式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現存하는 嘉禮都監儀軌를 보면, 왕세자의 納妃儀와 같이 모두 納采, 納徵, 告期, 冊妃, 親迎, 同牢宴으로 되어있다. 이런 제도와 실제간의 차이를 현실화시켜 王의 奉迎을 親迎儀로 고친 조치가 「國朝續五禮儀」(英祖20년, 1744年)에 반영되었다. 그 후 英祖는 「國婚定例」(1749年), 「尙方定例」(1752年)를 제정토록 하여 國婚禮를 엄격히 정비하였다. 이듬해 正月 初3日 賓廳領 中樞府使 宋時烈, 左議政 閔鼎重, 右議政 李尙眞, 禮曹判書 李端夏 등은 왕비의 德을 기리고 昇遐함을 애통히 여김과 동시에 繼妃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啓를 올렸다. 正妃가 사망하였을 경우 淑儀가 있으면 正位로 오르기도 하나 이 때 淑儀가 없어 處子를 간택하자는 것도 논의되었다. 이어 그 해 3월초 禮曹의 牒呈에는 初揀擇 날짜를 3월12일로 정한 전교가 있으며 3월26일 大王大妃殿의 下敎에 따라 三揀擇에서 閔維重의 딸이 繼妃로 채택되었다. 六禮는 納采(4월13일), 納徵(4월20일), 告期(4월25일), 冊妃(5월2일), 親迎과 同牢宴(5월13일)의 순서로 치러졌다. 이 행사는 17세기에 치러진 국왕의 가례 중 두 번째이며 모든 행사 일정과 물품의 기록이 상당히 방대하여 총 347면의 의궤가 작성되었다. 의궤의 目錄은 일목요연하게 되어있지 않으나 座目·啓辭·移關·禮曹牒呈·稟目·儀軌事目·書啓·論賞 등의 순서로 짜여 있고 업무 분담 부서는 一房·二房·別工作·別工作修理所 등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座目」에 의하면 都提調는 領議政 金壽恒이 맡았고 기타 提調, 郞廳 등 다른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 기재되어 있다. 各房儀軌에도 그에 해당하는 座目이 있다. 이 嘉禮의 「班次圖」는 모두 19면으로 17세기 가례반차도가운데 가장 긴 것이다. 班次圖 자체에는 무슨 행렬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의궤 가운데 “王妃가 별궁으로부터 詣闕할 때의 반차도를 前例에 의해 이미 그려 들였다(王妃自別宮詣闕時班次圖 旣已起畵依例入)”는 文章이 있어 王妃가 同牢宴을 치르러 入闕하는 행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왕비의 輦 하나만 등장한다. 행렬의 제일 앞에는 砲殺手들이 양쪽으로 늘어섰고 가운데에 哨官이 있다. 그 뒤로 敎命, 玉冊, 金寶, 命服 등을 모신 彩輿가 순서대로 나아간다. 왕이 아닌 왕세자 가례 시에는 玉冊 대신에 竹冊, 金寶 대신에 印輿를 사용하므로 여기서는 한 단계 격상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뒤를 이은 王妃의 儀仗은 「國朝五禮儀序例」에 명시된 嘉禮/鹵簿 王妃儀仗條에 열거된 인물, 儀仗, 그리고 이들의 순서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으나 대략 비슷하다. 또한 世子嬪의 행렬에 없었던 典樂과 16인의 樂工들이 각종 악기를 들고 행렬에 참여한 것을 볼 수 있다. 왕비의 輦을 시위한 각종 남녀 騎馬, 또는 步行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그 뒤를 이어 史官, 도감의 당상이하 郎廳 등이 모두 붉은 색 朝服을 입고 화려하게 행렬을 장식한다. 행렬의 後尾는 先頭와 같은 구성을 보인다. [소장현황 및 이본관계] 御覽用, 禮曹 및 네 군데 史庫 分上用으로 모두 6件이 제작되었고 현재 御覽用은 파리 국립도서관에(BNF 2527)에, 太白山과 五臺山 史庫本은 奎章閣(奎38084, 奎38085)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