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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효전일기 [景孝殿日記n1-2책] - 해제

G002+AKS-AA55_22418_000 【정의】 【서지사항】 표제는 ‘경효전일기(景孝殿日記)’이고 필사본이다. 표지 우측 상단에 ‘乙未八月二十日’이라 하여 본 일기가 시작되는 날짜를 명시하고 있다. 장정은 선장(線裝)이고 분량은 1책 243장이다. 무곽(無郭)이고 무괘(無罫)이며 반엽(半葉)은 15행인데 글자수는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판심(版心)이 없고 일부 면에는 좌측에 해당 날짜의 연월(年月)을 세필로 표기한 곳도 있다. 본 일기를 제작한 곳은 장례원(掌禮院)으로 보인다. 장례원은 1895년(고종32) 4월에 기존의 종백부(宗伯府)를 고쳐 신설된 관청으로 궁중의 각종 의식과 제사, 능원(陵園)과 종실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본 곳이다. 【체제 및 내용】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고종(高宗)의 황후(皇后)로 성(姓)은 閔氏이고 본관(本貫)은 여흥(驪興)이며 증영의정(贈領議政) 치록(致祿)의 딸이다. 9세 때 부모를 여의고 여주(驪州)의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1866년(高宗3)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의 추천으로 왕비(王妃)에 책봉되었다. 1873년 일본에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어 국제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 대원군(大院君)의 실정이 계속되자 이를 계기로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민씨의 외척정권을 수립시키고 대원군 계열의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고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실각하자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여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일본세력의 침투로 점차 김홍집(金弘集) 등의 친일정권이 득세하고 1894년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어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했다. 이듬해 일본공사 삼포오루(三浦梧樓)가 부임했으나 계속 이들을 견제하며 친러책을 강화하자 일본이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삼포오루가 거느린 일본 낭인들이 8월 20일 궁궐에 침범하여 민비를 시해(弑害)했다. 이때 고종은 민비의 빈전(殯殿)을 태원전(泰元殿)으로, 혼전(魂殿)을 문경전(文慶殿)으로 정했고 이듬해 9월에는 함녕전과 중화전(中和殿) 중간에 경소전(景昭殿)을 지어 혼전(魂殿)으로 삼았다. 그리고 1897년 1월에는 시호(諡號)를 ‘명성(明成)’으로, 능호(陵號)를 ‘홍릉(洪陵)’으로 정했으며, 동시에 전호(殿號)를 경효전(景孝殿)으로 정했다. 1898년 수리를 위해 혼전을 잠시 즉조당(卽祚堂)으로 옮긴 일도 있으며, 1904년 화재 때에는 준명당(浚明堂)의 서행각으로 옮기기도 했다. 『경효전일기』에 실려 있는 제반 내용은 1895년 8월 20일부터 1898년(고종35) 8월 20일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먼저 음력 날짜와 날씨가 기록되어 있고 해당 기록이 그 뒤를 잇고 있다. 1895년(고종32) 11월 17일부터는 음력 날짜 아래에 양력 날짜를 함께 병기하고 있다. 을미개혁(乙未改革) 이후 공식적인 문건에서 양력(陽曆)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록할만한 사안이 없는 경우에는 날짜와 날씨만을 적고 있다. “개국(開國) 504년 을미(乙未)년 8월 20일 무자(戊子)일 맑고 서풍(西風)이 불었다. 묘시(卯時)에 왕후(王后)가 경복궁(景福宮) 곤녕합(坤寧閤) 옥호루(玉壺樓)에서 승하(昇遐)하셨다.(開國五百四年乙未八月二十日戊子晴吹西風卯時王后昇遐于景福宮坤寧閣玉壺樓)”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본 일기의 첫 번째 기록은 민비(閔妃)의 승하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이 기록은 추후에 기록된 것이다. 왜냐하면 동년 10월 15일조에 “지난 번 변란 때 왕후(王后)의 소재(所在)를 알지 못하였으나 날이 점차 흘러가 그 날에 세상을 떠난 증거가 정확해졌다. 개국 504년 8월 20일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승하했음을 반포(頒布)한다.”라는 고종의 조칙(詔勅)이 뒤늦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 거애(擧哀)•피발(披髮) 의식, 총호사(總護使), 빈전제거(殯殿提擧), 국장제거(國葬提擧), 산릉제거(山陵提擧), 삭망헌관(朔望獻官), 전사(殿司), 축사(祝史), 재랑(齋郞) 등 국장(國葬)을 주관하거나 도울 수많은 관리를 임명하는 절차가 보인다. 그리고 조포곡(朝脯哭), 조석곡(朝夕哭), 영침곡(靈寢哭), 두탕곡(豆湯哭), 조전(朝奠), 다례(茶澧), 빈전별전(殯殿別奠), 대전상(大殿賞), 격향(格享), 친제산재(親祭散齋), 아헌례(亞獻禮), 홍릉작헌례(洪陵酌獻禮), 경효전제(景孝殿祭), 삭제(朔祭), 망제(望祭), 망곡례(望哭禮), 사시대제(四時大祭), 기신제(忌辰祭), 존작례(尊酌禮), 소상제(小祥祭), 대상제(大祥祭), 납향대제(臘享大祭), 왕태자친전잔(王太子親奠盞), 삼주제(三周祭) 등 제반 제례의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각종 제례에 참여하는 인원과 소요된 물품, 배설(排設)한 찬물(饌物), 각 부서에서 진상한 물품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다. 그리고 [大行王后昇遐告文], [山陵擇日別單], [引山告由文] 등 각종 고유문(告由文)과 별단(別單), 고종의 조서(詔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맨 마지막 날에는 경효전(景孝殿)과 홍릉(洪陵)의 여러 관리(官吏)의 정원과 임명에 대한 기사가 보이고, 삼주제(三周祭) 이후에 향관(享官), 도설리(都薛里), 참봉(參奉), 충의(忠義), 설리(薛里), 주방(酒房), 진지(進止), 수복(守僕) 등에게 상(賞)을 하사하는 상격(賞格)이 기록되어 있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한말(韓末) 궁중에서 설행된 장례 절차와 그 양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소장 현황 및 영인관계】 규장각에 『景孝殿日記』(奎13046)가 소장되어 있는데 내용은 동일하다. 이외에 장서각에 소장된 『景孝殿掌攷』(K2-2419)를 통해 경효전의 구체적인 규모와 소속된 관원 및 그 임명과 봉록 등에 대해 고찰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