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2_je_a_vsu_22186_000G002+AKS-AA55_22186_000 【정의】 【서지사항】 본 홀기는 필사본으로 장정은 선풍엽(旋風葉) 첩장(帖裝)으로 되어 있고 1첩(帖) 2절(折)이며 단행(單行)의 간략한 주석이 보인다. 괘(罫)는 주사란(朱絲欄)이다. 홀기가 제작된 시기나 그 경위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왕셰자비’•‘왕셰자’•‘왕뎐하’ 등의 호칭이 쓰이는 것으로 보아 국권이 피탈된 1910년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황제(皇帝)는 왕(王)으로, 황태자(皇太子)는 왕세자(王世子)로, 태황제(太皇帝)는 태왕(太王)으로 격하된 바 있기 때문이다. 【체제 및 내용】 일반적으로 혼례 절차는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청기(請期), 납징(納徵), 친영(親迎) 등으로 구분되는데, 친영은 신랑과 신부가 만나 혼인을 치르는 예를 말한다. 친영은 식전 행사로서 초자례(醮子禮)와 초녀례(醮女禮), 그리고 혼인례로서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동뢰지례(同牢之禮), 합근례(合巹禮) 등이 있다. 혼례가 끝난 이후에는 조현례(朝見禮)와 묘현례(廟見禮) 등이 치러진다. 본 홀기는 영녕전(永寧殿)에서 묘현례(廟見禮)를 올리는 절차를 기록하고 있다. 영녕전은 조선 태조(太祖)의 선대 4조 및 종묘의 정전(正殿)에 봉안되지 않은 조선 역대 임금과 그 비(妃)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다. 1421년(세종3)에 건립되어 그 해 12월 목조(穆祖)의 신주가 제1실에 옮겨진 이래 170여 년을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정전과 함께 소실되어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중건되었다. 1667년(현종8)에 다시 중건되었으며, 1836년과 1870년에 각각 개수되었다. 조선에서는 국왕이 승하하면 종묘 정전에 모시었다가 5세의 원조(遠祖)가 되었을 때 영녕전으로 옮기어 모시게 되어, 영녕전을 천묘(遷廟)한다는 뜻의 조묘(祖廟)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는 태조의 4조(祖)인 목조(穆祖)•익조(翼祖)•탁조(度祖)•환조(桓祖)를 비롯하여 정종(定宗)•문종(文宗)•단종(端宗), 기타 추존된 왕과 왕비 등 32위(位)의 위패를 16실에 봉안하고 있다.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은 일본 황실의 이른바 내선일체 융합정책에 따라 1920년(순종13)에 일본 왕족 나시모토(利本宮)의 맏딸인 마사코와 동경(東京) 하관(霞關)의 이궁(離宮)에서 혼례를 거행하였다. 1922년(순종15) 4월에 영친왕과 왕세자비(王世子妃), 왕손(王孫) 등이 동경에서 돌아와 덕수궁(德壽宮) 내 석조전(石造殿)에 입궐하여 창덕궁(昌德宮)에 배알하고 대조전(大造殿)에서 근견례(覲見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왕세자비는 동년 4월 29일에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 선원전(璿源殿), 의효전(懿孝殿) 등에서 묘현례(廟見禮)를 거행하였는데, 이때 영녕전에서 거행한 조현례의 절차를 기록한 것이다. 본 홀기에서 언급하는 ‘왕뎐하’는 순종을, ‘왕셰자’는 영친왕을, ‘왕셰사비’는 영친왕의 배위인 마사코를 가리킨다. 본 홀기의 절차는 왕세자비가 수규(守閨)의 인도를 받으며 배위(拜位)에 나아가 북향(北向)으로 서는 것에서 시작된다. 다음으로 왕세자와 왕전하가 각각 수칙(守則)과 상궁(尙宮)의 인도를 받으며 입위(立位)에 선다. 전찬(典贊)이 “국궁사배흥평신(鞠躬四拜興平身)”이라 창(唱)하면 왕세자비가 이를 행한다. 마지막으로 왕전하와 왕세자, 왕세자비가 각각 상궁과 수칙, 수규의 인도를 받으며 퇴출(退出)하는 것으로 본 홀기의 절차가 마무리되고 있다. 본 홀기는 조현례의 절차를 미리 정해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절차의 오류를 막고 시비의 근원을 방지하는 목적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일제 강점기에 행해졌던 궁중 의례 중 묘현례(廟見禮)의 세부 절차를 고구할 수 있는 자료이다. 【소장 현황 및 영인관계】 이와 동일한 홀기는 보이지 않는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