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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류편 [坎流編] - 해제

G002+AKS-AA55_20889_000 【정의】 1680년(肅宗6) 11월 24일부터 1685년(肅宗11) 4월 11일까지를 수록한 定齋 朴泰輔(1654~1689)의 自筆 仕宦日記. 【서지사항】 1책 83장의 手稿本으로 각 면의 크기는 25.5×17.5cm이다. 匡廓과 版心, 魚尾, 絲欄은 보이지 않고, 반엽의 글자 수는 10行 22字이며, 雙行의 주석이 드물게 보인다. 手稿本인 탓에 글자를 삽입하거나 塗抹하거나 수정한 부분이 상당량에 이른다. 書體는 단정한 楷書와 行草가 혼용되어 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행초가 많아진다. 표제와 내제는 모두 ‘坎流編’이다. ‘潘南朴氏泰輔士元甲午己降乙卯生員丁巳壯元壬戍賜暇定齋散人之章’과 ‘藏書閣圖書印’이라 새겨진 소장인이 찍혀 있는데, 前者는 박태보가 직접 날인한 소장인으로 자신의 본관과 성명, 字, 生年, 生員에 입격한 연도와 文科에 장원한 연도, 賜暇讀書에 被選된 시기, 號 등이 명시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坎流編』은 定齋 朴泰輔의 자필 사환일기로 1680년(肅宗6) 11월 24일부터 1685년(肅宗11) 4월 11일까지를 수록하고 있다. 표제에 보이는 ‘坎流’는 험난한 곳[구덩이]을 만나면 멈추고 흐름[물결]을 타면 흘러간다는 뜻으로 ‘坎止流行’을 도치시킨 표현이다. 『漢書』 「賈誼傳」의 “물결을 타고 흘러가고, 구덩이를 만나 멈춘다.(乘流而逝, 得坎而止)”에 출전을 두고 있다. ‘坎流編’이라는 제목을 통해 逆順의 환경에 순응하여 자신의 進退를 결정하겠다는 박태보의 처세관을 엿볼 수 있다. 『坎流編』의 저자인 朴泰輔는 본관이 潘南이고, 자는 士元이며, 호는 定齋이다. 西溪 朴世堂(1629~1703)의 아들로 伯父인 朴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75년(肅宗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77년 謁聖文科에 장원하였으며, 賜暇讀書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이조좌랑, 이천현감, 파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서인 중에서 宋時烈과 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그 옳고 그름을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1689년(肅宗15) 기사환국 때 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데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교유한 인물은 주로 西人의 少論派들로 崔錫鼎, 趙持謙, 林泳, 吳道一, 韓泰東 등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坎流編』은 1680년(肅宗6) 11월 24일부터 1685년(肅宗11) 4월 11일까지를 수록하고 있다. 연도와 월별로 수록된 시기를 정리해보면, 먼저 1680년(肅宗6)의 11월과 12월, 1681년(肅宗7)의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10월, 11월, 12월, 1682년(肅宗8)의 1월, 2월, 5월, 6월, 8월, 9월, 10월, 11월, 1683년(肅宗9)의 윤6월, 8월, 1685년(肅宗11)의 4월이다. 통상적인 일기의 경우처럼 날씨나 개인 신변잡기의 기술은 과감히 생략하고 사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사안이나 정치적 현안에 한정하여 정리하고 있다. 따라서 특별한 사안이 없어 일기를 기록하지 않은 날짜가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차지한다. 전반부에는 老論의 李端夏와 상호 論劾을 반복하는 기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한편 1683년과 1685년에는 상소문만 세 편이 실려 있다. 學諭 朴益茂의 상소문과 沃川 儒生 趙匡漢의 상소문, 公洪道 生員 李景華 등의 상소문이 그것인데, 박익무의 상소문은 박태유가 大老를 무함한 정황을 낱낱이 꼬집은 내용이고, 조광한의 상소문은 朴泰維와 趙持謙, 吳道一 등의 죄상을 통박하며 이들을 斥黜할 것을 요청한 것이며, 이경화의 상소문은 宋時烈을 등진 尹拯을 논척하며 朴泰維, 朴泰輔, 吳道一 등을 黨與로 묶어 논박한 것이다. 각각의 상소문 후미에는 “박태유가 疏 안에 말을 꾸며댄 것이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어진이를 막고 나라를 병들게 한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문자가 애초에 上徹되지 않았으니, 단지 傳聞에 의지하여 譴罰을 베푼다면 국체를 손상시킬 것이며,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朴泰維䟽中措語, 若果如此, 則妨賢病國之罪, 烏得免乎! 第其文字, 初未上徹, 而只憑傳聞, 輒施譴罰, 有傷事體, 亦關後弊也)”와 “말을 하는 가운데 가려서 쓰지 아니한 것이 많고, 잘 헤아리거나 서로 화합하려는 도리가 없으니, 이것이 가히 한탄스럽다.(措語之間, 多不擇發, 殊無裁量和平之道, 是可歎也)”라는 숙종의 관대한 비답이나 “상소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疎不入)”라는 주석이 실려 있다. 이러한 숙종의 비답이나 주석은 박태보의 입장을 일면 옹호해주거나 혹은 정치적 부감감에 적지 않은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한편 마지막 면에는 “自壬戌二月, 至丙寅十月, 凡擬正言者四, 持平五, 校理二十, 修撰二十, 吏正 一, 吏佐十三, 獻納十六, 凡七十九擬”이라 적으며, 4년여에 걸친 자신의 官歷을 정리하고 있다. 박태보의 문집인 『定齋集』은 부친 朴世堂의 주도로 1702년(肅宗28)에 原集 9권, 別集 5권, 附錄 합 7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坎流編』은 『定齋集』 「別集」 권4와 권5에 上ㆍ下編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장서각에 소장된 저자의 수고본 『감류편』을 『정재집』 소재 『감류편』과 비교해보면, 장서각 소장 수고본 『坎流編』에는 丙寅年(1686년) 1월, 2월, 10월, 11월, 12월에 씌어진 기사와 丁卯年(1687년) 1월, 2월, 5월, 6월, 7월에 씌어진 기사가 누락되어 있다. 박세당이 『定齋集』을 編次할 때 두 해의 기록까지 추가로 合本하여 간행한 것이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감류편』은 박태보의 정치 행보를 기록한 사환일기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한 부분이 다수를 차지하고 다양한 상소문과 임금의 하교가 기재되어 있다. 특히 전반부에 보이는 文廟 從祀와 黜享에 관한 논의나 吏曹判書 畏齋 李端夏를 비판하며 논박한 것 등은 박태보의 정치적 행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안이었다. 숙종조의 정치적 현안에 대한 소론 인사의 견해를 파악하는데 유효한 자료이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이와 동일한 서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박태보의 문집인 『定齋集』 「別集」 권4와 권5에 추가된 내용과 함께 上ㆍ下編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定齋集』(民族文化推進會 影印本). 『藏書閣圖書韓國版總目錄』(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72). 『藏書閣의 歷史와 資料的 性格』(韓國精神文化硏究院,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