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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군사실록 [江城君事實錄] - 해제

G002+AKS-AA55_20683_000 【정의】 江城君 忠宣公 文益漸에 관한 여러 기록 및 詩文을 후손 文泳光 등이 모아 간행한 책자를 대본으로 하여 다시 베낀 필사본. 【서지사항】 필사본으로, 線裝1冊(36張)이다. 無郭, 無絲欄, 半葉 10行 19字이다. 註雙行이며 版心이 없고, 크기는 27×17cm이고, 紙質은 楮紙이다. 【체제 및 내용】 『江城君事實錄』은 元나라로부터 목화씨를 가져와 의복생활에 큰 도움을 준 江城君 忠宣公 문익점과 관련된 여러 기록을 모아 간행한 『三憂堂實紀』 등을 다시 요약한 필사본이다. 이 책자의 구성 체제를 살펴보면, 맨 앞부분은 李夏錫이 행서로 쓴 서문이 있고, 다음으로 凡例, 문익점의 생애를 다룬 記事, 列聖朝襃典, 先賢의 律詩 및 祭文, 퇴계 이황의 『孝子碑閣記』, 『고려사』 『文益漸傳』, 홍문관 수찬 姜亻+寅이 製進한 賜額祭文, 대제학 黃景源이 쓴 告由祭文, 그리고 李瀰의 神道碑銘, 황경원의 묘지명, 姜世晃의 『江城祠圖記』, 1766년(영조42) 判下新頒事目, 추가로 附記한 선현의 詞章, 道川書院 致祭文 등이 실려 있다. 이 책자의 뒷부분에는 문익점의 후손으로 江城書院에 合享된 楓菴 文緯世(1534~1600)의 行狀이 부록으로 있고, 마지막으로 문익점의 15世孫인 文泳光이 쓴 忠宣公功行錄의 발문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문익점은 1363년(공민왕12) 서장관으로, 李公遂를 따라 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 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와서 장인 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여 일반 백성의 의복생활에 획기적인 혜택을 준 공로로, 조선 태종조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江城君으로 추봉되었다. 江城은 경상도 丹城縣으로, 현재 지명으로 경남 산청이다. 고려말 이 곳에서 문익점이 출생하였기 때문에 江城君으로 추봉된 것이다. 그의 호는 三憂堂, 시호는 忠宣이다. 국가, 학문, 德을 근심하는 데에서 유래하여 三憂堂이라 自號하였다. 『列聖朝襃典』을 보면, 태종·세종·세조·성종·중종·선조·경종·영조 등 역대 조정에서 계속 문익점 자손에게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優恤하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중종조 기묘년 옥사에 문씨 가문의 인물이 연좌되어 이때부터 문씨 가문은 쇠락하여 떨치지 못하였다. 당시 연좌된 인물로는 형조참판 文瑾, 홍문관수찬 文璿, 생원 文繪地가 있다. 『孝子碑閣記』의 배경을 살펴보면, 문익점은 어머니의 喪을 당하였는데, 그때 마침 왜구들이 침략하여 사람들이 모두 피란을 갔지만, 문익점 만은 상복을 벗지 않고 죽기를 맹세하고 피란을 가지 않아 왜구도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加害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익점의 효성을 襃揚하기 旌閭를 한 것이다. 본 책자에는 남명 조식, 일두 정여창, 慕齋 김안국, 鶴沙 金應祖, 추강 남효온, 한훤당 김굉필 등 문익점의 행적을 찬미하는 先賢의 여러 詩가 실려 있다. 부록으로 실린 『풍암공행장』은 번암 채제공이 찬하였다. 풍암공 문위세의 자는 叔章으로, 미암 유희춘과 퇴계 이황의 문인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군량 조달 등의 공로를 세웠고, 1595년 龍潭縣令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때 다시 읍민을 동원하여 왜적을 격퇴하는 등의 공로를 세웠다. 사후 문익점을 배향한 長興 소재의 江城書院에 제향 되었다. 이 책자의 대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三憂堂實記』에 대해 살펴보면, 1819년(순조19) 후손 文桂桓 등이 편집 간행하였는데, 이를 1900년(광무4)에 重刊하였다. 『三憂堂實記』는 1464년(세조10) 문익점의 曾孫인 사헌부 감찰 文致昌이 事實本紀를 편찬하였고, 朴思徽의 行蹟記, 文泳光의 功行錄과 諸賢의 贊文을 모아 6권 3책으로 편찬한 것이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강성군사실록』은 여러 판본이 현존하는 『三憂堂實記』과 刪削한 내용의 비교를 통해 편찬의식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참고문헌】 『고려사』 『文益漸傳』 김성준, 『歷史와 回顧』, -제3부 문익점과 목화-, 국학자료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