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2_je_a_vsu_20201_000G002+AKS-AA55_20201_000 【정의】 【서지사항】 3권 2책. 신식활자본. 1779년(正祖3)에 지은 박사정(朴思正)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남하정이 말년에 지은 것이라고 하며, 1740년대의 기사가 수록된 것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박사정은 남하정의 계자(季子)인 남하행(南夏行, 1697~1781)의 제자인데 스승의 지시에 따라 본래는 3책이던 것을 중복된 것을 산삭하고 기사의 차례를 바로잡아 상하(上下) 2권으로 만들었다. 1925년에 일반 대중에게 널리 보급하고자 활자본으로 출간하면서 편차를 다시 한번 수정하여 3권 2책으로 만들었다. 권말에 수록된 박사정과 한정원(韓井源)의 발문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권두에 수록된 「동소선생약전(桐巢先生略傳)」은 남하정의 행장과 묘갈명을 참조하여 이때 지어진 것이다. 【체제 및 내용】 남하정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시백(時伯), 호는 동소(桐巢)이다. 아버지는 성균관 진사 수교(壽喬)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로 부사(府使) 석로(碩老)의 딸이다.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심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다. 그는 글을 잘 지어 문명을 크게 떨쳤으며 1714년(肅宗40)에 진사가 되었으나, 세도(世道)의 어지러움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였다. 평생을 진위(振威: 지금의 경기도 평택)의 동천(桐泉)에서 은거하여 처사적 생활을 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의 저술은『동소만록』외에 『사대춘추(四代春秋)』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7권 4책의『동소유고(桐巢遺稿)』가 남아 있어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동소유고』에는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황덕길(黃德吉)이 지은 묘갈명 이 부록으로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기호남인의 정통학맥으로 평가되는 이들이 모두 남하정을 위해 묘갈명을 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안정복이 지은 묘갈명에서는『동소만록』에 대해서 “당론이 인심을 가두어 막고 있음을 통탄하였는데 위세로서 하지도 않고 애호하는 마음으로 하지도 않아서 한결같이 바름으로 돌아갔다.(痛黨論之錮人心也 不以威 不以愛護 一歸于正)”라고 극찬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기본적으로 기호남인들의 정치사에 대한 입장을 대변해주는 당론서(黨論書)로 파악된다. 동소유고(桐巢遺稿)』의 체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문에 앞서 권두에「동소선생약전」과 인용서목(引用書目)을 싣고 있는데, 이들은 1925년 활자본으로 간행하면서 덧붙인 것이다. 41종의 인용서목은 중에 『유씨도올(柳氏禱杌)』∙『석실록(石室錄)』등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잡록(雜錄)류로 이름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만으로도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대략의 내용은 1379년 이성계(李成桂)가 삼남지방에 침입해 온 왜구(倭寇)를 무찌르는 과정에서의 일화로부터 시작하여 1740년대까지의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다. 그중 동서분당(東西分黨) 이후 당론과 관련된 사실이 중점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아마도 남하정은 분당(分黨) 이후의 사실을 서술하면서 필요한 경우 그 이전 사실들을 추가로 적었던 것을 박사정이 편집하면서 연대순으로 재정리하였으며, 이를 다시 활자본으로 출간하면서 다시 한번 재정리하여서 이처럼 통사적인 느낌을 갖는 서술이 된 것으로 보인다. 권별로 수록된 주요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권1에서는 태조의 시호추상(諡號追上)과 단종의 묘호(廟號)에 관련된 문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진행 과정, 임진왜란의 처리 문제, 광해군 때의 기사, 인조반정과 그에 따른 논공행상 문제 등이 서술되었다. 인물에 관한 기술로는 이이(李珥)∙성혼(成渾) 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데 특히 성혼에 대한 비판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권2는 병자호란 당시 전쟁을 피할 수 있었으나 대안이 없는 청론(淸論)들로 말미암아 전쟁을 초래하였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 후 주로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비판을 편협한 성품으로 인해 상대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태도, 내용 없는 북벌(北伐), 박세당(朴世堂)을 사문난적으로 배척하여 죽음을 당하게 한 사건 등을 거론하며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권3에서는 기사환국(己巳換局) 이후 남하정 당대의 일들을 기술하였다. 남하정은 기사환국 이후 당로(當路)했던 남인들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허목(許穆)에 대해서는 대단히 우호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이는 그가 『미수기언(眉叟紀言)』의 내용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기호남인들이 문외파(門外派), 문내파(門內派) 및 과월파(跨城派)로 분열되어 있는 모습, 영조대의 탕평책에 편승 하여 오광운(吳光運)이 시류에 편승한다는 기술 등은 당시 기호남인들의 동태를 생생히 서술한 것으로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본서는 평생 재야에서 처사로서 삶을 영위한 남하정이 당대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폐해를 당파의 전개에서 진단한 것이다. 18세기 중반 기호 남인의 정치적 입장을 파악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본서 외에도 2권 2책의 필사본과 8권 4책의 목판본이 국립중안도서관과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3권 2책의 활자본인 본서 또한 장서각 외에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은『조선당쟁관계자료집(朝鮮黨爭關係資料集)』(여강출판사, 1978), 활자본은 『당재사료집(黨爭史料集)』(오성사, 1981) 으로 영인된바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화연구원, 1991. 『규장각도서해제』 사부 1,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