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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번대의 [東藩大義n1-8책] - 해제

G002+AKS-AA55_20196_000 【정의】 【서지사항】 8권 8책. 필사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집 경위는 알 수 없다. 서술의 형식은 중국 황제의 재위기간에 따라서 서술하는 방식을 채택하였으며, 각각의 기사를 서술한 다음에는 전거를 제시하였다. 중국측 자료인 『명사(明史) - 조선전(朝鮮傳)』, 『고황제어제시(高皇帝御製詩)』를 비롯해 우리측 자료인 『열성지장(列聖志狀)』, 『소대전칙(昭代典則)』을 비롯해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및 개인 문집인『모재집(慕齋集)』, 『월사집(月沙集)』, 『우암집(尤庵集)』, 『도암고(陶庵稿)』 등이 전거자료로 이용되었다. 이용된 자료로 보아 대체로 숙종대 후반 혹은 경종대나 영조대 초반 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체재 및 내용】 각권별 내용을 보면, 권1에는 1392년(태조1) 조반(趙胖) 등이 국도평의사(國都評議司)의 주문(奏文)을 가지고 명 태조 고황제에게 군신이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한 사실과 이것이 천명에 의한 것이라면서 승인하는 기사를 시작으로, 이후 국호를 추인받는 과정, 1394년(태조3) 종계변무를 위해 주문을 보낸 사실 등이 수록되었으며, 1522년(중종17) 참판 강징(姜消)이 명나라 세종(世宗)의 등극진하사(登極進賀使)로 간 기사까지가 실려 있다. 권2에는 1523년(중종18) 왜노(倭奴) 등원중림(藤原中林) 등이 중국 영파부(寧波府) 등지에서 난을 일으키고 도망가다 황해도에서 잡혔는데, 조선측에서 성세창(成世昌)을 파견해 주문(奏文)을 보내면서 이들의 수급(首級)을 바친 사실을 시작으로, 1592년(선조25) 4월 평수길(平秀吉)이 26만을 이끌고 침략한 사실과 이후 전황과 명나라 군사의 파견 등을 기록하였고, 1593년(선조26) 12월 경주에서 우리측 병사(兵使) 고언백(高彦伯) 등과 명나라 장수 오유충(吳惟忠) 등의 활약 내용과 광주(光州)에서 김덕령(金德齡)의 의병 봉기, 중강개시를 통한 활의 무역 기사까지가 실려 있다. 권3에는 1594년(선조27) 훈련도감을 설치한 사실을 시작으로 기록하였는데, 1600년 의용무안왕묘(義勇武安王廟)를 설치한 기사까지가 실려 있다. 이 시기 훈련도감의 설치는 앞서 평양성을 수복한 후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에게 병법의 자문을 구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구득(購得)하고, 환도 뒤 훈련도감을 설치해 그 병법(兵法)에 의거, 연습하였다고 한다. 권4에는 1601년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지(平義智)가 귤지정(橘智正)을 보내 포로를 돌려보내면서 화호(和好)와 통관시(通關市)를 요구하자, 이를 명나라의 예부와 병부에 자문(咨文)을 보내 주문한 기사를 시작으로, 1620년(광해군12)과 이듬 해에 각각 명나라 광종(光宗)이 죽고, 희종(熹宗)이 즉위한 기사에 대해 조선 유자들의 기록을 정리한 것까지가 수록되었다. 권5에는 1621년(광해군13) 이수광(李睟光)이 작성한 의(議)와 이정구(李廷龜)가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지고온 황제의 칙서로 기사를 시작하였으며, 1627년(인조5) 남이웅(南以雄)이 황자(皇子)의 탄생을 축하하는 표문(表文)을 가지고 갔다가 황자가 이미 죽었기에 황제가 표문과 방물(方物)을 받지 않았다는 기사와 한여직(韓汝稷) 등이 새로운 황제을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기사까지 수록하였다. 이 가운데 이수광이 작성한 의문은 후금에서 보내온 사신을 배척하며 이들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며, 후반부에는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은 잊을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권6에는 1628년(인조6) 후금에서 용골대(龍骨大)∙박기내(朴其乃)를 보내 전달한 호서(胡書)를 시작으로, 1636년 2월 후금이 국호를 청이라 칭하고 용골대 등의 사신을 의주로 보내 칸(汗)을 황제로 높이기를 요구한 것과 용골대가 이때에 파견된 것은 인렬왕후(仁烈王后)의 조제(弔祭)에 당하여 조선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한 기사와 홍문관, 사간원 등에서 제출한 척화 기사들이 수록되었다. 권7에는 1636년 12월 11일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청나라의 군사가 압록강을 건넌 사실을 보고하는 장계(狀啓)와 같은 달 12일 원수(元帥)의 장계가 이때에 비로소 들어온 것은 적들에게 장계를 탈취당했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시작으로, 남한산성의 항전 내용들을 비롯해 1637년 1월 30일 청나라에 항복한 뒤의 인조가 환도하면서 통곡하였다는 내용과 환도 후에 내린 애통교지(哀痛敎旨), 같은 해 4월 우의정 최명길(崔鳴吉)이 제출한 차자(箚子), 이상목(李商穆)의 「남한하성론 南漢下城論」 등이 수록되었다. 권8에는 1637년 2월 2일 항복 후 남한산성 내 민심의 어수선함과 청나라 칸(汗)이 떠나자 국왕이 동교(東郊)에서 전송하였다는 것과 13일에 이르러서 병사가 철수되었다는 기사 등을 시작으로 송시열(宋時烈)의 삼학사전(三學士傳) 등을 수록하였으며, 1639년 삼전도비(三田渡碑)를 건립 및 그에 관련되어 정준(鄭儁)의 묘갈명(墓碣銘), 송시열의 연보 등을 수록하였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이 책은 17세기 후반 이후 존주론적(尊周論的)인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 하여 편찬된 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중국에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우리의 경우는 종전부터 고수해오던 친명정책을 포기하지 못하고 반청존명의 대의론을 강하게 표방하였다. 이런 가운데 1704년(숙종30)에는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하여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였으며, 송시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본 서는 이런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은혜)’을 강조하며, 이른바 소중화 사상을 표방하면서 편찬된 책이다. 조선시대 대중국관계를 이해하는데 지침이 되는 서적임과 동시에 17세기 후반 당대 지배층의 중화의식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서적이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선후기 對明義理論의 변천」(李泰鎭, , 『아시아문화』10, 한림대학교,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