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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해위록 [南漢解圍錄] - 해제

G002+AKS-AA55_20187_000 【정의】 【서지사항】 1책 40장, 한문필사본. 석지형은 1610년(光海君2)에 출생했으며, 본관은 화원(花園), 자는 숙진(叔珍), 호는 수현(壽峴)이고, 형조좌랑 강화부유수 등을 지냈다. 서문 및 말미에 “戊寅夏四月(1638년 여름 4월)”이라는 간기를 볼 때 병자호란 직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문에 따르면 당시 저자는 27세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직책으로 임금을 호종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이 등사된 것은 1854년(甲寅) 이운회(李雲會)에 의해서이다. 말미에 같은 해에 수원유생들이 조정에 올린 글이 첨부되어 있는데 이운회가 함께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체제 및 내용】 본서는 36장이 『남한해위록』이며, 뒤에 「망월(望月)」 등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의 절구시 5편 등과 조석우(曹錫雨)가 할아버지 문집을 간행하면서 윤증의 송시열에 대한 언급을 누락한 일에 대해 수원유생들이 조정에 올린 글을 첨부하였다. 본서의 서문에서는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을 언급하였으며, 본문의 서두에서는 여진이 금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묘호란을 일으킨 일과 병자년에 청으로 이름을 고치고 조선을 침략하게 된 과정을 기술한 뒤 병자년 12월 9일부터 이듬해 2월 11일까지 일어난 사실을 일자별로 기술하였다. 이어서 4월부터 11월까지의 일은 월별로 기술하였으며, 말미에 발문을 실었다. 청나라의 공격과 왕실이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옮긴 일, 척화파와 주화파의 다툼, 인조의 항복과 소현세자를 비롯한 신하들의 압송 등의 일이 차례로 기술되어 있다. 나만갑의 『병자록』과 비교하면 보다 왕의 일상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어 1637년(丁丑) 1월의 기록을 보면 『병자록』에는 정월 초하루를 맞이해서 광주목사가 가래떡을 진상해서 몇 가래씩 나눠먹었다고 하였는데 본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이 임금이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초조하고 번민하여 허리띠를 풀지 못하고 하루에 먹는 식사량이 불과 쌀 한 그릇에 닭다리 하나였는데 이날은 닭다리조차 먹지 않겠다고 하여 신하들이 걱정했다는 내용을 실었다. 또한 이 날 청나라 황제가 순행을 왔다는 기록에 대해 『병자록』에서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지만 본서에서는 청나라 황제가 서쪽을 정벌하느라고 여기까지 오겠느냐고 의심하고 또 조정에서 이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음을 기록하였다. 2월 4일자에도 『병자록』에는 별일 없다고 했지만 본서에서는 인조가 몸이 불편한데 식사를 하지 않았으며, 술을 마시고 싶어도 없어서 마시지 못했다는 내용을 실었다. 월별 기록에서는 세자의 동향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4월에는 심양에 사신으로 간 이성구(李聖求)가 세자환궁에 대한 말을 하지 못했다 해서 적었으며, 여름 4월, 가을 7월, 겨울 10월에 세자가 여전히 심양에 있음을 기록했다. 저자의 『남한일기』가 공식적인 사실 위주로 기록되어 있다면, 본서에서는 전란의 진행상황은 물론 이를 겪는 인물의 심리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저자는 발문에서 남한산성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집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이는 형세와 힘이 부족해서 임금이 오랑캐에게 굴욕을 당한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여 후세의 경계를 삼기 위함이라 했으며 병란의 시종은 물론 자세한 상황까지 숨기지 않았다고(不揣膚末) 하였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본 서는 저자가 쓴 『남한일기(南漢日記)』∙『남한산성기(南漢山城記)』 및 나만갑(羅萬甲)이 쓴 『병자록』, 김상헌(金尙憲)이 쓴 『남한기략(南漢紀略)』 등과 함께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에 대한 연구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등이 있다. 【참고문헌】 CD롬 『조선왕조실록』, 동방미디어. 석지형, 장서각 소장본 『남한일기』. 羅萬甲 著, 尹在瑛 譯,『丙子錄』, 正音文庫 169, 1979. 권인혁, 「석지형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소재영, 「병자록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