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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사 [葵史] - 해제

G002+AKS-AA55_20171_000 【정의】 【서지사항】 2권 2책. 목활자본. 권말에 ‘己未(1859년) 季冬 達西開刊’이란 간기(刊記)가 적혀있어 간행된 연도와 편찬 장소를 확인할 수 있다. 편찬자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권말에 첨부된 부록의 뒤에 덧붙인 글에 “지금 고려조의 인물로부터 우리 조선조 제현(諸賢)에 이르기까지 널리 드러나 세상에서 공히 아는 이들을 『규사』의 끝에 차례대로 수록하여 오당(吾黨)에 일찍이 사람이 없지 않음을 드러내 보이고 또 후세 사람을 면려한다(今自麗朝間人 以至我朝諸賢 表著而世所共知者 敍列於葵史之末 以示吾黨未嘗無人 又以勉後者)”는 대목이 보여 편찬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서얼 중에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소개하여 우리 무리[吾黨]에게 인물이 없지 않음을 보이고, 후배들을 격려하고자 한다는 표현으로 미루어볼 때 『규사』의 편찬자는 대략 대구 지방의 서얼 출신 문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체제 및 내용】 본서의 간행처인 달서강사는 조광조(趙光祖)와 이이(李珥)를 추앙하는 유림단체가 석담강규(石潭講規)에 의거하여 매년 춘추 맹월(孟月)에 모여서 이이의 향약문(鄕約文)을 강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하던 곳이다.(권2 54면 참조.) 서얼 허통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 조광조요, 이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 중 하나가 이이였던 까닭에 이들은 조광조와 이이의 서얼 차별 타파의 정신을 받들어 이 책을 편찬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규사(葵史)라는 책이름에서 ‘葵’는 “해바라기가 해를 향함에 곁가지가 본 가지와 다름이 없는 것처럼, 인신(人臣)으로 충성을 원함에 어찌 적자만 그러하리오.(葵藿向日 不擇旁枝 人臣願忠 豈必正嫡)”라는 선조의 비답(批答)에서 따온 것이다. 서얼에 관계된 사실과 장주(章奏)를 왕조 순으로 서술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권1에서는 서얼금고(庶椧禁錮)가 시작되었던 1413년(太宗13)부터 1774년(英祖50)까지 서얼의 관직 진출과 관계되는 사실, 칠서(七庶)의 옥(獄) 등 서류(庶類)의 동향, 복제(服制) 문제 등을 싣고 있으며, 또 다른 서얼관계 서적인 『통색문답(通塞問答)』의 일부도 수록하고 있다. 서얼금고는 1423년(太宗13) 우대언(右代言)으로 있던 서선(徐選)이 서얼 자손에게는 현직(顯職)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청했고, 태종이 이를 가납(嘉納)함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시 강희맹(姜希孟) 등이 ‘庶孼子孫勿許文武生進之法’이란 구절을 삽입하였으며, 이어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柳子光)이 주륙당하고 난 뒤, 그가 서얼 출신이라고 하여 금고(禁錮)를 더욱 가혹하게 함으로써 이 법은 확고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그 후 조광조∙이이∙성혼∙조헌∙이항복∙유성룡 등이 서얼 허통을 주청하였다. 이런 분분한 논의 속에서, 서얼 스스로가 최초로 반기를 든 것은 1613년(光海5)이었다. 이 책의 기록에 의하면 양반의 서자들인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심우영(沈友英)∙이경준(李耕俊)∙박치인(朴致仁)∙박치의(朴致義) 등은 가혹한 신분적 금고를 개혁하기 위해 여강(驪江)가에 굴을 파고 광해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재원을 염출키 위해 봉물(封物)과 재화를 털다가 박응서가 조령(鳥嶺)에서 체포됨으로써 그 음모가 탄로되었다. 강변칠우(江邊七友)의 옥사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하여 서얼의 벼슬길은 더욱 막히어갔다. 이후 숙종(肅宗) 연간에 송시열(宋時烈)∙박세당(朴世堂) 등이 인재등용의 시급함을 강력히 주장, 허통(許通)을 상소하였고 김수항(金壽恒)이 이들에게 무과만이라도 수용(收用)하자고 진주(陳奏)하였다. 서모(庶母)∙서손(庶孫)의 복상(服喪) 문제까지 제기되었으나, 3백년 전래의 구법을 하루아침에 개폐할 수 없다는 명분에 의해 그 실현을 보지 못했었다. 권2에서는 1777년(正祖1)부터 1859년(哲宗10)까지의 서얼관계 사실을 수록하고 있는데, 정조가 내린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의 내용을 맨 앞에 싣고, 이어서 각지 유생들의 상소와 소회(所懷) 등을 수록하고 있다. 1823년(純祖23) 7월에 있었던 육도유생(六道儒生)들에 의해 이루어진 만인소(萬人疏)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을「계미헌의(癸未獻議)」라고 부른다. 종래에는 명망 있는 유자나 명신에 의해 개별적으로 건의되었으나 이「계미헌의」는 재야 유생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서얼허통 건의의 획기적 의의를 지닌다. 이후 1848년(憲宗14) 11월에도 육도 유생 이진택(李鎭宅) 등 9천인의 상소가 있었고, 1850년(哲宗원년) 3월에는 경기∙충청∙경상의 삼도 유생 죄제경(崔濟京) 등 1, 200인의 상소가 연달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책 뒤에는 부록「규사현인록(葵史賢人錄」이 첨부되어 있는데, 고려와 조선시대 서얼출신 인물에 대한 간략한 전기(傳記)이다. 여기에는 정문배(鄭文培)와 이세황(李世璜) 등 고려시대 인물 2인, 어무적(魚無迹)을 비롯한 조선시대 인물 63인이 실려 있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18세기 들어 서얼들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지고, 정조 연간에는 이덕무∙박제가 등이 규장각 검서로 기용되어 국왕의 신임을 받았다. 본서의 내용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19세기에는 만인소와 같은 지방 유생들의 집단적 상소가 이어지기도 했다.『규사』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편찬된 것이다. 편자∙편년 미상의 필사본인 『규사속편(葵史續編)』도 규장각도서에 현전하고 있다. 본서는 조선조 분분한 논란 속에 시행되었던 서얼 차별 정책의 과정을 간명하게 제시하여 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1968년 이화사학연구소(梨花史學硏究所)에 의해 영인본이 출간된 바 있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장서각 및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화연구원, 1991.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 사부 1,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