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2_je_a_vsu_20165_000G002+AKS-AA55_20165_000 【정의】 內侍들이 거처하는 公事廳에서 1894년(開國 503년 갑오)부터 1904년(光武 8년 갑진)까지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서지사항】 5권 5책 짜리 필사본인데, 권1~4와 권8만 있고, 권5~7까지는 낙질되어 있다. 필사자는 미상이고 필사 시기는 대략 1927년에서 1935년 사이이다. 【체제 및 내용】 우선 권1에는 ‘開國五百三年 甲午 正月初’로부터 시작하여 그 날에 임금이 직접 행했던 일들을 짤막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앞부분의 경우 날마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대략 사흘에서 이레 간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내용은 정해진 때마다 이루어지는 제사, 신하들을 접견하는 일, 각국의 公使, 과거에 입격한 儒生들에게 賞을 내리는 일,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동한 일 등 통상 임금이 행한 일정들이 적혀 있다. 그러나 갑오년 정월 20일 이후부터는 매일 매일의 일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먼저 그날의 날씨, 바람의 방향을 필두로 하여 하루 동안 행해진 일정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특기할 만한 큰일을 들자면, 의병의 봉기를 촉발한 갑오변란, 즉 1894년 6월 21일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새벽에 경복궁의 迎秋門으로 난입하여 궁내를 총과 칼로 협박한 일 등 날로 거세지는 日帝의 침탈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12월 12일과 13일에 걸쳐 임금이 종묘의 永寧殿과 正殿에 나아가 선왕들에게 자주 독립의 내용을 담은 誓告文과 우리나라의 최초의 헌법인 洪範14條를 올린 일을 적고 있다. 이때 올린 서고문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富國强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적고 있다. 12월 17일에는 ‘왕실의 존칭’을 모두 새롭게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 12월 27일에는 동학난을 진압한 뒤 巡撫營을 폐지한 일, 능치처참 같은 死刑 제도를 없애고 法務에서는 다만 絞首刑, 軍務에서는 砲만을 사용(銃殺刑)토록 하였다. 다음으로 권2에도 역시 정월 초하루부터 그날의 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8월 20일(戊子, 날씨 맑고 서풍이 불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날의 일기에는 해가 빛을 잃었다고 하여 그날의 일을 적고 있는데,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군부대신 조희연, 공부대신 정병하 등을 이 사건의 ‘四賊’으로 규정하면서 卯時(05시~07시)에 궁문이 열리기도 전에 궁궐의 담에 걸어놓은 사다리를 타고 난입하여 명성황후가 기거하는 건청궁의 玉壺樓로 침입하였다고 하였다. 그밖에 11월 17일까지의 일기가 태음력으로 기록되어 있고(대한제국은 1895년 9월 9일부터 태양력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일기는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월 1일로 정하여 일기가 계속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부터는 양력 1월 1일과 음력 17일을 병기하는 식으로 태양력과 태음력의 날짜를 병기하여 일기를 기록하고 있다. 권3에는 ‘建陽 元年 丙申 正月 爲始’라고 하여 1896년에 새로운 연호와 태양력에 따른 날짜로 시작함을 표시하고 있다. 이어서 3월 초 5일부터 대략 며칠 간격으로 임금이 행한 그날의 일정들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그러다가 병신 정월 초 1일(양력 2월 13일) 임금이 러시아 공관으로 駐御(俄館播遷: 1896년 2월 11일~1897년 2월 20일)하였기에 궁내부 이하 조정 백관들이 문안하러 갔다고 했다. 따라서 고종의 아관파천 동안에는 날씨 다음에 ‘위와 같은 곳에 머물고 있음(駐御上同)’이라고 하여 임금의 소재지를 적고 있고, 이에 따라 그곳에서 행해지던 조회, 제향 등과 같이 반복되는 평상적인 일들이 주로 적혀 있다. 다음으로 권4에는 ‘光武 元年 正月初’부터의 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전히 명성황후의 喪中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이에 관련된 내용이 주로 기록되어 있다. 아관파천을 끝내고 고종은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의 大猷齋로 돌아오던 날인 2월 20일의 기록을 살펴보면, 날씨가 맑고 서풍이 불었다고 그날의 날씨를 기록하고 나서 辰時(07시~09시)에 경운궁으로 還御했다고 했다. 이때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壽安門, 義緣門을 지나 경운궁의 대유재로 왔다고 했다. 또한 4월 초칠일 일기에는 고종과 왕세자가 직접 쓴 명성황후의 행록인 ‘大行王后行錄’이 첨부되어 있다. 10월 3일의 일기를 보면, 고종이 稱帝를 한 내용이 적혀 있고, 國號를 大韓帝國으로 선포했던 날인 10월 11일 등 칭제건원의 기치를 높이 세웠던 때에 행했던 모든 일들의 일정이 비교적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國葬日 11월 21일을 전후한 일기는 무슨 까닭인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다음으로 권8에는 몇 년을 건너 뛴 뒤에 광무 5년(1901년) 양력 2월 19일부터 벌어진 일을 일기로 다시 기록하고 있어 4년여의 일기가 누락되어 있다. 대체로 제향, 신하들을 조회한 일, 외국 공사들의 접견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제향의 경우는 구체적으로 적시되고 있지만, 신하들을 조회하거나 외국 공사들의 경우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있다. 어떤 때는 월식과 일식이 일어난 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그림까지 덧붙이기도 했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공사청 일기는 내시들의 거처인 공사청에서 기록된 일기로서 왕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내시들의 공무 특성상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오고갔는지를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그 날 그 날에 있었던 일정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열강에 포위된 채 진행된 대한제국의 힘겨운 역사의 현장을 가까이서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공사청 일기의 가치를 살필 수 있다. 특히 아관파천 기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루어진 고종의 활동 등은 하루하루의 일상이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因山日처럼 매우 중요한 때를 전후한 일을 기록한 일기는 아예 누락되어 있는 점은 사료로서 아쉬움이 남는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고, 영인본은 없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 『고종실록』. 『大韓季年史』. 『韓國痛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