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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부원록(고종 3년병인, 1866) [開城赴援錄(高宗 3年丙寅, 1866)] - 해제

G002+AKS-AA55_20160_000 【정의】 1866년(고종3) 丙寅洋擾가 일어났을 때 開城에서 江華로 지원군을 파견한 전말을 기록한 책으로 前 현감 王錫綬(수)가 지었다. 【서지사항】 2권 1책 짜리 필사본으로 1867년(정묘) 3월에 전 현감 왕석수에 의해 기록되었다. 【체제 및 내용】 우선 ‘開城赴援錄’은 상하로 되어 있다. 우선 서양 오랑캐들이 조선에 침범한 일과 서양의 邪敎(천주교를 말함)로 벌어졌던 일들을 통해 경계의 예로 삼고자 한다고 했다. 대략 매일 매일의 전황과 그날 있었던 상황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선 병인년 7월 보름에 異樣船 한척이 강화도 松亭에 쳐들어왔다. 이때 강화 유수 李寅夔가 마침 일이 있어 서울에 가있었기 때문에 경력 金在獻과 朴熙景이 그곳으로 가서 사정을 캐물었다. 그 이양선에 타고 있던 戴拔(Oppert, 1882~?)과 汪文山 등이 프랑스 主敎를 죽인 까닭을 캐묻고 통상의 뜻을 묻는 등 강화에 나타난 프랑스 함대의 출현과 이에 따른 협상 과정, 이들이 물러나게 된 과정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때 경력 金是年과 高忠厚, 박희경 등이 대표가 되어 닷새의 말미를 주고 물러날 것을 이들과 협상했다고 했다. 또한 프랑스 쪽에서는 乾餠과 溫茶를 대접하고 다음날에는 우리 쪽에서 답례로 포구로 오도록 하여 술과 안주를 대접했다고 했다. 커다란 대접에 술 세 잔을 주니 더 달라고 하여 다섯 잔을 마시고 이들 가운데 馮芝林이라는 자는 암벽에 시를 쓰고 돌아감으로써 함대가 일단 철수했다고 했다. 다음으로 이양선이 그 달에 다시 평안도 대동강으로 갔다가 사람들에 의해 불탄 일, 8월 17일에 2척의 이양선이 西江의 하류에 다시 나타난 일(이른바 2차 원정) 등을 옛날 거란 등의 침입에 견주어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다시 황해도 柳川 근방에 이르러 아이들을 만나 은전을 주기도 했는데, 이때 옆에 있던 李枝蕃이라는 사람이 이들에게 논어에 “부모가 계시면 멀리 놀러가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너희들은 먼 곳에서 왔으니 부모 형제도 없는가 보다”라고 했다는 구체적인 일화도 기록되었다. 이에 9월 11일에 전국 방방곡곡에 榜을 붙여 알리고 각 別將들로 하여금 赴援토록 명령했다고 했다. 이에 따라 忠義의 고장인 松都에서는 軍籍에 소속된 左右別騎士 480명, 步卒 3,030명, 각읍에 있는 군교 4,500여명, 대흥산성에 있는 軍額 720여명, 礪峴鎭의 군액 680여명, 白峙鎭 군액 410여명, 泰安, 倉耜(사), 石屯 등지의 여러 군액들을 동원하였다고 했다. 이리하여 이들은 강화도 남문 쪽으로 진격하여 진을 쳤는데, 당시 그곳 사람들은 모두 난을 피해 도망가서 마을이 텅 비었다고 했다. 12일 頷井浦 守防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양선 한척이 巳時(오전 9:00~11:00)에 나타나 바닷물의 깊이를 측정하려고 월곶에서 山里浦, 堂頭浦, 함정포, 祖江, 柳川 등지를 다니다가 돌아갔는데, 배에는 15명이 타고 있고 속도가 아주 빠르고 大椀口 연달아서 通津, 영정포 쪽으로 쏘아대었다고 했다. 또한 삼경에 이르자 이양선 두척이 함정포에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약탈하는 일이 있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도망갔다고 했다. 13일 아침에도 적병의 작은 배 한 척이 강화에서 교동으로 나아갔다고 했고, 16일 전황을 보면 적군이 越城의 뒤쪽으로 와서 염탐을 하러 왔다가 아군의 군복을 입은 사람을 해치고 갔다고 했다. 17일에는 문수산성에서 불길이 솟아 海西 여러 곳의 지원 선박 12척이 예성강가에 이렀고, 山里浦 앞에 敵船 한척이 나타났다고 했다. 18일에도 역시 산리포 앞에 적선 한척이 나타나 그곳을 지나는 우리의 私船에 대완포를 쏘았다고 했다. 그리고 적장인 魯斯(로스)가 자칭 大英國의 大都督이라 부르며 산리포에 편지를 보내자 아군 쪽에서는 크고 작은 배 16척을 柳川浦로 출동시켰다고 했다. 다음으로 9월 19일에는 함정포의 守防哨官 韓德敎의 보고에 따르면 어제 갑곶진 앞에 敵船 두 척이 통진 쪽으로 갔는데, 통진 문수산성 서문 밖 강변에서 광주의 포수들이 적군 4~50명을 사살했다고 했다. 그러자 적군 10여명이 서문으로 쳐들어와 주변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갔다고 했다. 또한 같은 날 산리포 앞에 敵船 한척이 나타나 대포를 쏘고 사라졌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각 날짜별로 이루어진 그날의 전황 등을 기록하고 있고, 끝쪽으로 가면 이때 병인양요에 관련해서 포상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과 개성부에서 특별 과거를 실시하여 이에 합격된 사람들의 명단도 실려 있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과 프랑스군 사이의 전황과 이에 따른 조처들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어 병인양요에 관련된 사료로서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참고문헌】 『고종실록』. 『일성록』. 『龍湖閑錄』. 『丙寅日記』(양헌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