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2_je_a_vsu_20158_000G002+AKS-AA55_20158_000 【정의】 조선 후기 노론∙소론의 분립에 관련된 자료로서 50여 명의 서간∙상소∙차자(箚子)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논형(論衡)’이라는 이칭이 있으며, 《甲乙錄》이라는 책명은 노론과 소론이 분립한 숙종 10년(1684, 甲子)∙11년(乙丑)의 간지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서지사항】 5권 5책의 필사본이다. 정확한 편찬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취급된 자료의 하한은 1722년(경종 2)이다. 편찬자 또한 불명이나, 실린 내용으로 볼 때 소론의 거두 윤증(尹拯)의 후손이 모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체제 및 내용】 권두에 서문처럼 쓰여진 글에 이 책을 『甲乙錄』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 이본에 따라 다르지만, 본가에 있는『定百錄』,『俟百錄』등의 책을 베껴서 편찬했다고 했다.『갑을록』이라는 책이름은 이른바 尹宣擧의 묘갈명에 송시열이 윤선거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있을 때의 일을 언급하면서 야기된 회니시비(會泥是非)는 급기야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宋時烈과 尹宣擧 사이의 宿怨이 尹拯(號 明齋, 尹宣擧의 아들, 1629~1714)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끝내 老∙少의 분당을 가져오게 된 癸亥(肅宗9) 이후 甲子∙乙丑의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수록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선 제1책에는 1657년~1683년(孝宗8~肅宗9)까지 尹宣擧가 宋時烈, 송준길,朴世采, 尹鑴, 李惟泰 등과 주고받은 편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있을 때 부인은 목을 메어죽었음에도 자신은 미복차림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구한 일에 대한 부끄러움을 임금에게 진정하는 글 등이 실려 있다. 또한 회니시비의 빌미를 제공한 송시열의 글들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회니시비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글이 바로 송시열이 쓴 묘갈명인데, 여기서 송시열은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을 받아서 글을 지었다. 그런데 묘갈명에서 윤선거의 학문 연원과 거취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나 학문 造詣의 깊이나 의리의 精粗는 사람들이 가히 알 수 없어 자신처럼 윤선거에 비해 재주가 크게 차이가 나는 사람은 오래 사귀어도 그의 깊은 구석을 살펴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오직 玄石 박세채의 행장이 아주 자세하기에 그에 의거해서 글을 짓고 참람되거나 경솔한 짓을 면하고자 한다고 하여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윤증과 박세채 등은 글귀를 改撰해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나 송시열은 크게 고치지 않았다. 이때 고쳐진 글귀의 내용은 바로 아래 협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때 이 문제로 오고간 편지들도 함께 실려 있다. 제2책에는 1684년~1686년(肅宗10~肅宗12) 사이에 묘갈명의 改撰을 청하는 尹拯의 書에 대한 宋時烈의 答書, 송시열과 朴世采 사이에 오고간 편지, 박세채외 윤증 사이에 오고간 편지 등이 실려 있고, 7월24일의 답서 끝에는 “懷川의 이 편지 이후로 (편지) 往復之義가 단절되었다. 그래서 그 대략을 오른쪽과 같이 적는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으로 郭知叔과 윤증 사이에 오고간 편지 등이 실려 있다. 그 뒤로 尹拯은 宋時烈과 師弟의 禮를 행하지 아니하고 史局에 書를 보내어 尹宣擧의 ‘江都之事’를 변명함에 있어 李珥의 일을 예로 들었다. 이에 四學儒生들이 궐기하여 尹拯이 부친을 신원하고자 망령되이 先正을 욕보인다 하여 이 문제는 조정에까지 파급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일을 크게 우려한 宋時烈은 上疏陳情하여 자신의 부덕을 자책한 바 있으나, 왕은 이미 尹拯을 전일과 같이 대하지 말라는 敎命을 내리고, 士林과 諫官 사이에는 論斥과 伸救의 疏가 계속되었다. 이 일은 결국 송시열을 지지한 金錫胄, 金壽興, 金壽恒, 閔重鼎, 李端夏, 李敏叔 등은 老論, 南九萬, 吳道一, 朴世采, 崔錫鼎 등은 尹拯과 더불어 少論으로 나뉘게 되었다. 제3책에는 1687년~1689년(肅宗13~肅宗15) 사이에 오고간 글들이 실려 있다. 우선 헌납 金斗明의 疏, 定齋 朴泰輔가 윤증에게 보내는 편지, 진사 趙正萬이 송시열을 두둔하면서 올린 疏 등이 실려 있다. 제4책에서 1690년~1715년(肅宗16~肅宗41) 사이에 이루어진 글들이 실려 있다. 대략 尹拯이 大司憲, 吏曹判書 등을 辭하는 疏와 1714년 尹拯이 죽은 뒤 崔錫鼎이 館儒를 대신하여 지은 祭文, 1715년 兪棨의『家禮源流』의 출간됨에 따라 이 책의 저작을 둘러싸고 일어난 분쟁에 관한 자료, 權尙夏의 源流序後文, 鄭澔의 源流跋, 權尙夏上疏 및 館儒吳命尹等疏, 申救疏, 湖南儒生 柳奎等의 疏, 左議政金昌集箚子, 儒生同被罪罰疏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5책에는 1716년~1722년(肅宗42~景宗2)까지의 기록들이 실려 있다. 대략 1717년 윤선거와 윤증의 관직이 삭탈된 뒤 이들의 신원 요구가 계속되면서 1722년 신임사화로 노론 四大臣이 쫓겨나고 다시 소론이 득세하게 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에 관련된 자료들이 실려 있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본 자료는 윤선거의 묘갈명의 글귀 문제로 출발한 송시열과 그의 제자인 윤증 사이에서 발생한 회니시비의 전말을 기록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회이시비에 의해 노론과 소론의 분당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당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본 자료는 윤증의 후손들에 의해서 수집,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일방적으로 소론 쪽의 입장에 치우쳐 있는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장현황 및 영인관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당의통략』. 『택리지』. 『연려실기술』.